불교의 적멸사상(寂滅思想)(Ⅱ)
불교의 적멸사상(寂滅思想)(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9.1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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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한국국제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을 보면 크게 위진 시대에서 수당에 이르는 수입 및 쟁변의 시기와 성당에서 청말까지의 독행(篤行)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경전 번역에 힘쓰면서 각 종파별로 쟁변과 융화에 주력하였다면, 후자는 안정된 교리에 발판하여 평이하면서도 행동으로 고행했다. 그 종파는 수당 이후에 비담(毘曇) ‧ 성실(成實) ‧ 율(律) ‧ 삼론(三論) ‧ 열반(涅槃) ‧ 지론(地論) ‧ 정토(淨土) ‧ 선(禪) ‧ 섭론(攝論) ‧ 천태(天台) ‧ 화엄(華嚴) ‧ 법상(法相) ‧ 진언(眞言) ‧ 구사(俱舍) 등 14종으로 분파되었는데, 각각 경전에 근거했다. 그러나 그 뒤 열반은 천태에, 지론은 화엄에, 섭론은 법상에 병합되어 결국은 11종으로 유전되었는데 그 중에도 삼론 ‧ 화엄 ‧ 천태 ‧ 선 ‧ 법상종 등은 중국 학술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정토와 진언종 등은 민중과의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염불참선으로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정토종과 선종의 영향은 가장 깊고 가장 보편화되었다. 이로써 만당(晩唐) 이후는 불교의 중심지는 인도보다 오히려 중국에 옮겨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중국 전통적인 유가와 도교 사이에서 서로의 조화도 있었지만 서로의 충돌은 심각했다. 특히 도교와의 알력은 더욱 치열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엔 불교의 진의를 몰라 도가와 혼동했고, 한나라 환제는 불 ‧ 노(佛老)를 한꺼번에 제사지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모두 신령의 불멸을 믿으며 재계제사를 일삼거나, 공(空)이나 무(無) 같은 비실재를 본체로 여기는 점에서 공통성을 띠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도(佛道)의 충돌은 도교가 흥성한 위진 남북조 시대에 가장 격렬했다. 진(晉)대의 도사인 왕부(王浮)가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통해 불교를 풍자함을 비롯해 북위(北魏)의 대무제(大武帝),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등의 승려 학살, 사찰 소각 등의 불교 탄압이 있었고, 그 여세는 당 무종(唐武宗) 때와 오대(五代) 후주 세종(後周世宗) 때까지 미쳐 절 3만 여 군데를 불사르기에 이르렀다. 이런 탄압은 대강 신흥외래 세력인 불교의 정연한 교리와 급증하는 교세에 대한 일종의 질투라고 볼 수 있었다.
한편 당 고조(高祖) 무덕 8년(武德八年, 625) 때부터 고조가 석전(釋奠)을 거행한 뒤 유 ‧ 도 ‧ 불의 3교도가 모여 교리를 강론했다. 서로가 고립하지 않고 서로 융합하고 관통했으니 이 영향은 오대(五代) 이후에 유가에게 이학(理學)을 촉진시켰고, 송명(宋明) 이후 민간에겐 3교 합일의 이론을 진작시켰다. 유 ‧ 불 ‧ 선(儒佛仙)의 조화론이 몇 세기를 대두했으나 불교의 전파는 더욱 가열 일로에 놓였다. 위진(魏晉) 이래 불교가 없었다면 중국문화는 또 다른 체질로 성장되었으리만큼 그 영향은 크다. 거기에는 많은 결정적인 원인이 따른다.
그 결정적 원인이 3개가 있는데, 첫째 불교의 전래되는 시기가 적중했다. 동한(東漢) 이후 몇 세기는 줄곧 난세와 외우내한, 혹경, 질병 속에 시달려왔다. 한편 중국의 고유종교와 서주로부터 예악화된 뒤, 정신적인 공허감을 메우기 어려웠던 만큼 한정이 있는 망술 만을 운용하는 도교로서 구제받기 보다는 불교에 훨씬 의지하게 되었다. 학술적으로 현학(玄學)을 즐기는 시대인지라 마침 불교의 교묘한 변론은 당시 지식인들의 현담(玄談)의 취미에 만족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현실을 도피할 수 있었다. 또한 도교와 시대를 함께한 지라 지식인에게 그 교리를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결국 도교는 허점만을 노출시킨 결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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