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꺼지지 않는 영원한 진주 정신 ‘개천 예술제’
(9) 꺼지지 않는 영원한 진주 정신 ‘개천 예술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8.0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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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시에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동시에 시작한 축제가 있으니 바로 개천 예술제이다.
요즈음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는 시비를 걸면서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19년 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힘으로 조선을 침공했던 악몽이 떠올라 몹시 씁쓸하다. 그 당시 1, 2차 진주성 전투로 진주 목사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는 원수지간이 된다. 오죽하면 - ‘모쿠사의 목’ (김시민 목사)을 일본으로 가지고 오라- 는 명령을 내렸겠는가?
그러나 이 명분 없는 살육의 전쟁을 피하고자 일본의 한 유능한 젊은 장수가 있었다. 22살의 일본의 ‘사야가(沙也可)'장군은 조선 땅에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다음과 같이 귀하하려는 마음을 바친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후략)” 투항한 ‘사야가’는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78회 전투에서 승리한다.
 사야가의 모하당 문집에는 그가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는 답신도 적혀있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따라 벌써 각 진에 가르치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왜군)을 전멸하기를 밤낮으로 축원 하옵니다." 종전 후 그는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높은 문물을 보고 항복한 일본의 장군 모하당 김충선(慕夏堂 金忠善     1571~1642)이다. 그는 진주와의 악연을 끊고 한 가족이 됨으로써 한. 일간의 새로운 평화의 길을 트고 회복하고자 진력하였다.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은 모래(沙)에서 나온 금(金)이라는 뜻으로 선조가 성을 하사하니 사성 김씨의 시조가 되고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 되었음에도 나라가 주는 녹을 받지 않는다. ‘신하로서 당연히 한 일에 무슨 대가가 필요하냐?“ 는 마음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결혼을 하니 서른 살이 되는 해(선조 36년)이다. 조정은 여진족을 막기 위해 내방소를 설치하고 그에게 북방 경비를 맡기니 10년 간 빈틈없이 지켜낸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북쪽 땅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자 66세의 나이에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중 조정에서 항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도 끝났구나."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경상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후학을 가르치며 살다가 72세로 세상을 떠난다.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과 나란히 묻히고 지증추 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뺨 붉은 22세의 젊은 청년 왜장 ‘사야가’는 ‘김충선’ 장군이 되어 조선의 땅에 뼈를 묻고 지금도 후손들이 번창하고 있다. 그가 흠모한 것은 힘으로 빼앗음이 아니라 평화이었고 비참한 전란 중에도 발견되는 조선인의 높은 효충도 정신이었으니 바로 국조 단군의 홍익의 정신이었다.
진주시에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동시에 시작한 축제가 있으니 바로 개천 예술제이다. 6.25전란 시를 빼고는 한결같이 기려온 그 창제정신의 취지를 살펴보자.

진주 개천 예술제 '제2의 창제 취지문'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겨레는 시월에 하늘 굿을 올리고 노래와 춤으로 신명을 풀어 왔으나 포학의 사슬은 굿판을 덮고 겨레의 신명을 앗아 갔다. 그러나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이 겨레는 죽지 않고 살아 광복의 깃발로 나라와 신명을 찾아다 제자리에 앉혔다. 우리는 한 핏줄 하나의 말씨 하나로 사는 터전을 지켜 내느라 온 진주성민이 목숨을 던져 불꽃을 이룬 임진· 계사년 저 장엄한 역사의 힘으로 여기 사도 진주에 시월과 겨레와 신명의 제단을 열고 단군성조에게 예술 문화의 꽃과 향기를 바쳐 올리기 비롯했다.

우리는 이 제전이 반세기를 뛰어넘은 이제 ‘지나간 밤’의 끝에서 머물렀던 광복의 깃발과 아우성과 감격의 어우러짐이라는 시대적 난장을 접을 때가 왔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분리된 겨레가 분리된 채로 있으면서 예술과 문화의 꽃을 온전히 피워낸다는 것이 어렵다는데 유의하고 나라에서 처음인 이 제전이 통일의 제전, 겨레의 난장으로 거듭나도록 지혜와 힘을 모아 갈 것을 다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제전을, 기능주의와 소재주의로 이름만 올리는 축제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에서 순정한 겨레의 일체 염원을 올리는 한 장의 소지(燒紙)와 같은 불사름이 되도록 이끌어 가고자 한다. 참으로 예술 문화는 통일로 가는 에너지이고 겨레를 지키는 아름다운 지렛대이다. 이를 확인하고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개천예술제’라는 이름을 담아서 반세기를 지나왔다. 실로 겨레의 천품이 살아나고 겨레가 하나로 교감하는 새로운 세기의 실천적인 제전을 이룩하고자 시민과 예술인들이 다시 창제하는 마음으로 삼가 제단 앞에 엎드리는 바이다.             [2004년 제54회 개천예술제〕

참으로 가슴 뛰는 글이니, 지하의 김시민 장군, 김충선 장군, 논개를 위시한 수많은 유명, 무명의 선령들이 춤을 추고 기뻐할 진정한 ‘단군성조’를 위한 한민족의 예술축제의 정신이다.
얼마 전 정부는 개천절을 요일제로 바꾸려 하다가 정신이 올바른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놀라서 철회 한 바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한민족의 건국일에 대한 ‘단군성조’의 뜻과 역사를 바로 알아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 1회 창제 취지문에는 단기 4282년(1949년)으로 기록된 것이, 제 2 창제문 에서는 ‘2004년’ 서기로 표현 된 것을 바로 잡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우리의 유구한 반만년 역사가 남의 나이로 계산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가 그러한즉 서기와 함께 쓰되 반드시 함께 적시되기를 국민의 한사람으로 간곡하게 바란다. 그리하여 이제 환갑을 맞이하는 진주 개천예술제가 “2011(4344)년 제61회 개천 예술제” 라고 당당하고 바르게 표기되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올바로 세울 때 제2, 제3의 올바른 일본인, ‘사가와’ = ‘김충선’ 장군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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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성 2013-09-27 18:44:07
김충선 장군 ,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