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적멸사상(寂滅思想)(Ⅲ)
불교의 적멸사상(寂滅思想)(Ⅲ)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10.0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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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한국국제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중국문화는 또 다른 체질로 변할 만큼 불교의 영향은 매우 컸었다. 거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는데, 첫째 원인으로써 불교의 전래되는 시기가 매우 적정했다.
둘째 원인으로는 불교단체의 엄밀한 조직과 강력한 계율, 그리고 체계있는 이론이 강점이 되어 지식인을 포함한 민간에게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자체 내의 정비 강화뿐 아니라 한(漢)대로부터 역대의 많은 제왕이 불교를 신앙하면서 이를 장려했다는 정책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불교의 교리나 신앙 방법이 중국 전통문화 정신과 융합되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불교가 개인의 신앙 여부에 따라 구제를 받는다는 가능성은 유가의 근본 교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거니와 관용적이고 평화적이며 대동적인 자비정신 또한 유교의 전통정신과 합치되는 것이다.
불교의 영향은 더구나 막대하다. 크게 문학예술 ‧ 학문사상 ‧ 사회 등 세 방면으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가 전래된 뒤 예술 방면의 영향은 문학보다 앞섰다. 불상과 벽화는 위진 남북조의 대표 예술이 되었으니, 동진(東晋) 때 중 축도일(竺道一)의 금섭지천상(金鍱之千像), 도안(道安)의 장팔미타동상(丈八彌陀銅像), 혜획(慧獲)의 장육석가동(丈六釋迦銅)은 불상의 남상이 되었고, 그 뒤 당 무후성력(唐武后聖曆) 때의 천불암(千佛岩), 남북조 때의 대동(大同) 및 용문(龍門)석불, 당(唐)대의 선무산(宣務山) ‧ 향당산(響堂山) ‧ 대불사(大佛寺) ‧ 천불산(千佛山) 등의 조각은 각 조대의 백미였으며, 당대에는 벽화의 기풍이 왕성하여 선도(善導)대사가 그린 정토변상(淨土變相)이 300여벽, 오도현(吳道玄)이 장안 ‧ 낙양(長安洛陽)에 그린 것이 300여벽이나 되었으니 송대까지 유존된 당대 벽화는 8524칸이나 되었다.
이 밖에 남종(南宗)의 왕유(王維)를 비롯해, 송대의 동원(董源) ‧ 미불(米芾), 원대의 예찬(淣瓚) ‧ 황공망(黃公望), 명대의 동기창(董其昌) 등에 계승된 청담한 문인화풍은 모두 불교를 독신한 나머지 산수나 설경 ‧ 불상 등을 그렸었고, 높이 1천 자나 되는 영령사(永寧寺)의 구층부도(九層浮屠)는 불교건축의 대표가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이론과 창작에 모두 깊이 영향이 스며있다.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문학 이론사상 최고의 명작인 바 그 이론 체재가 불리와 유관했음을 비롯, 최고(最古)의 문학형식 지침서인 주옹(周顒)의 <사성절운(四聲切韻)>, 심약(沈約)의 <사성보(四聲譜)> 등은 인도의 병음(拼音)에서 계시받아 반절(反切)로써 자음을 분석했고, 불경을 전독하다가 사성(四聲)을 분류케 되었으며, 송명(宋明)대에 유행했던 이학(理學)의 어록체(語錄體) 또한 선종(禪宗) 어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창작면으로는 위진 시대에 사영운(謝靈運)의 산수문학, 도연명(陶淵明)의 전원문학 속엔 모두 망아(忘我) ‧ 무아(無我)의 경계로써 불교사상의 최고표현임은 그들이 불교를 독신한 데서 나왔고, 사조(謝眺) ‧ 심약 ‧ 왕유 ‧ 맹호연(孟浩然) ‧ 유종원(柳宗元) 등도 불가시인(佛家詩人)으로 꼽혔으며, <서유기(西遊記)> ‧ <봉신전(封信傳)> 등 지괴(志怪)소설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살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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