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의 종교사상(宗敎思想)(Ⅰ)
중국 근대의 종교사상(宗敎思想)(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10.2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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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한국국제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모하메드가 유태인에게서 일신(一神)의 관념과 그리스도교에서 구세(救世)의 정신을 계시 받아 정식으로 회교를 창립한 것은 610년이었다.

형체도 방향도 시종(始終)도 없는 유일한 최후의 절대체로서 진재(眞宰)만을 신앙하는 절대 일신교(絶對一神敎)인 회교는 창립과 동시에 그 교도를 무력으로 전파시켰기에 멀지 않아 시리아 ‧ 팔레스타인 ‧ 로마 ‧ 이란 ‧ 이집트 ‧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다음 다섯 가지를 준수함으로써 신앙을 두텁게 했다. 첫째는 진재인 알라(Allah)에 대한 체언(諦言)을 외움으로써 복종과 기도를 표했다.
둘째는 매일 알라에게 다섯 차례씩 예배드리고, 셋째는 매년 한 달 동안을 재계함으로써 모든 음식과 색욕을 금절시켰다.
넷째로는 모든 교도는 1년 수입의 40분의 1이르 빈민 구제에 회사하고, 다섯째는 1년에 한 번씩 성지인 메카(Mecca)에 조례(朝禮)를 드린다는 것들이다.
회교의 중국 전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당 태종(唐太宗) 때인 628년에 모하메드의 친척이자 제자인 와카스(Saad Wakkas)가 광주(廣州)에 와서 전도하였다가 죽었다 함이다. 하나는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高宗本紀)에 밝혀 있듯이 당 고종 영휘 2년(651) 8월에 아라비아의 상인들의 중국과의 교역은 말레이시사 반도를 돌아 광주에 이르는 해로와 중동 아시아를 경유, 중국 서북지방으로 통하는 육로가 있었는데, 아라비아의 회교도는 육로를 통해 입국했었다.
그 뒤 당 현종(唐玄宗) 개원 14년(726)에는 아라비아에서 다시 사절을 보냈고, 안녹산(安祿山) 반란으로 전국이 소란하던 755년에는 아라비아의 아보스(Abbos) 왕조가 숙종(肅宗)에게 안란(安亂) 평정에 제공한답시고 수천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회교도는 중원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당 ‧ 송(唐宋) 양대를 통해 광주 ‧ 천주(泉州) ‧ 양주(揚州) 등지와의 무역을 하면서 집요하게도 회교의 전도를 잊지 않았다. 더구나 중국에서 회교 전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기는 역시 원대(元代)였다.
원(元)이 중국 통일 이전 먼저 중서아시아의 회교 국가를 평정하여 아랍문화를 흡수했는바 회교도에게 관직도 주었고 아랍의 회교도들은 운남(雲南) 등지에서 정식으로 회교의 전당을 열기도 했다. 원 ‧ 명(元明) 이후는 그 분포 구역도 확대되어 서북으로는 신강 ‧ 청해 ‧ 감숙(甘肅) ‧ 영하(寧夏) 등지를 기지로 삼았고, 내륙으로는 하북(河北)까지 전파되었다.
회교도의 대량 증가는 역시 청(淸)대였다. 만청(滿淸) 정부가 서북지방을 정복했을 때 당시의 주민이 대부분 회교 신도였기에 그 후 인구의 이동과 함께 회교도의 급증을 가져왔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특수했다. 그들의 단독신앙을 고집하면서 한(漢)족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회교도들은 중국 서북부의 도시에 집단으로 살면서 여관주인 ‧ 캐러밴 ‧ 백정 ‧ 피혁공 등의 직업이 많았고, 독실한 계율 때문에 돼지고기 ‧ 아편 ‧ 술 등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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