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한국국제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모하메드가 유태인에게서 일신(一神)의 관념과 그리스도교에서 구세(救世)의 정신을 계시 받아 정식으로 회교를 창립한 것은 610년이었다.
그들은 다음 다섯 가지를 준수함으로써 신앙을 두텁게 했다. 첫째는 진재인 알라(Allah)에 대한 체언(諦言)을 외움으로써 복종과 기도를 표했다.
둘째는 매일 알라에게 다섯 차례씩 예배드리고, 셋째는 매년 한 달 동안을 재계함으로써 모든 음식과 색욕을 금절시켰다.
넷째로는 모든 교도는 1년 수입의 40분의 1이르 빈민 구제에 회사하고, 다섯째는 1년에 한 번씩 성지인 메카(Mecca)에 조례(朝禮)를 드린다는 것들이다.
그 뒤 당 현종(唐玄宗) 개원 14년(726)에는 아라비아에서 다시 사절을 보냈고, 안녹산(安祿山) 반란으로 전국이 소란하던 755년에는 아라비아의 아보스(Abbos) 왕조가 숙종(肅宗)에게 안란(安亂) 평정에 제공한답시고 수천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회교도는 중원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당 ‧ 송(唐宋) 양대를 통해 광주 ‧ 천주(泉州) ‧ 양주(揚州) 등지와의 무역을 하면서 집요하게도 회교의 전도를 잊지 않았다. 더구나 중국에서 회교 전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기는 역시 원대(元代)였다.
원(元)이 중국 통일 이전 먼저 중서아시아의 회교 국가를 평정하여 아랍문화를 흡수했는바 회교도에게 관직도 주었고 아랍의 회교도들은 운남(雲南) 등지에서 정식으로 회교의 전당을 열기도 했다. 원 ‧ 명(元明) 이후는 그 분포 구역도 확대되어 서북으로는 신강 ‧ 청해 ‧ 감숙(甘肅) ‧ 영하(寧夏) 등지를 기지로 삼았고, 내륙으로는 하북(河北)까지 전파되었다.
회교도의 대량 증가는 역시 청(淸)대였다. 만청(滿淸) 정부가 서북지방을 정복했을 때 당시의 주민이 대부분 회교 신도였기에 그 후 인구의 이동과 함께 회교도의 급증을 가져왔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특수했다. 그들의 단독신앙을 고집하면서 한(漢)족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회교도들은 중국 서북부의 도시에 집단으로 살면서 여관주인 ‧ 캐러밴 ‧ 백정 ‧ 피혁공 등의 직업이 많았고, 독실한 계율 때문에 돼지고기 ‧ 아편 ‧ 술 등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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