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사상 전개과정(Ⅰ)
중국의 기독교사상 전개과정(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10.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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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한 것은 당 태종 정관(唐太宗貞觀) 9년(635) 기독교의 네스토리안계(係 : The Nestorian Christianity)의 알로펜(Alopen) 전도사가 장안(長安)에 들어와 경사의령방(京師義寧坊)에다 대진사(大秦寺)를 세우고 전도한 데서 비롯된다. 이를 당대엔 ‘대진경교(大秦京敎)’라 불렸는데, 당 고종 때엔 전국에 경사(景寺)를 지어 전도토록 했다.

경교는 당 무종 때 도교의 득세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는 거의 실전됐지만 몽고지방에선 명백을 유지하던 중 원 태조가 십자군 전쟁을 맞은 로마 교황에게 원조를 베풀게 되자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몽고는 중국에 있어 기독교의 부흥기지였다. 몽고인이 내륙에 진출하면서 기독교도 따라 진출했고, 그 뒤를 따라 세조 지원(世祖至元) 17년(1280)엔 로마 교황이 사절을 중국에 보내 왔고, 1294년엔 로마 교황에게 전도사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다 성당을 건립했고, 신도도 6천여 명에 달했으니 경교의 기초 작업이 끝난 셈이다.
당초(唐初)에서 원대까지를 기독교 전파의 제 1기로 친다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중역명 利瑪竇)가 내화한 명 신종(明神宗) 만력 8년(1580)에서 예수회(耶蘇會)가 해산되기까지 190년 동안을 2기로 칠 수 있다.
중국에선 명대에 이르자 도교나 불교가 약화되고 화교마저 위축되었다. 마침 서양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 혁신파인 신파 기독교(즉 예수교)는 로마 교황의 통치를 벗어나 종교 의식을 간소화함을 제창했고, 구파인 천주교는 정통파임을 강조했을 무렵이다.
천주교 중 일부 인사가 ‘예수회’를 조직하여 대외 전도를 강화함으로써 활력을 넣으려던 때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를 천주교 전도의 기지로 삼고 건너왔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의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서양의 과학 도구를 곁들여 왔다. 이때를 즈음하여 중국 성교삼걸(聖敎三傑)이랄 수 있는 서광계(徐光啓) ‧ 이지조(李之藻) ‧ 양정균(楊廷筠) 등이 천주교의 기둥이 되어 합력했기에 드디어는 중국 상류사회의 지지를 받았으나, 명 신종 때와 청 성조(淸聖祖) 때 두 차례에 걸쳐 배격을 받기도 했다. 더구나 강희 8년(1669)에서 강희 말년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천주교 배척정책과 건륭(乾隆) 시대의 천주교 억제정령으로 천주교 전파가 중단되었다가 함풍(咸豊) 8년(1858)의 천진조약으로 다시금 전도가 부활된 것이다.
신과 기독교인 예수교 또한 중국 전도를 노리다가 가경(嘉慶) 12년(1807) 영국의 모리슨(Robert Morrison)의 내화를 계기로 예수교의 전래가 시작되었으니 중국 기독교사의 제 3기를 장식한 것이다. 광주(廣州)에 잠입한 모리슨은 도광(道光) 14년(1834) 그가 죽기까지 27년간 <성경> 번역 ‧ 서적인쇄 ‧ 세례 전도 등 많은 공작을 통해 예수교의 기초를 닦았다.
모리슨의 뒤를 이어 많은 예수교 전도사가 중국에 들어왔고, 더구나 도광 22년(1842) 홍콩을 상항(商港)으로 연 뒤 신교의 전도는 활발하여 드디어 공리종(公理宗) ‧ 신의종(信義宗) ‧ 성공종(聖公宗) ‧ 침신종(浸信宗) ‧ 안식종(安息宗) 등 다섯 종파로 나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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