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도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비는 여태도 끈질기게 내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비를 나무라지 않았다. 누구도 끝없이 내리는 비에 대해 불만하지 않는 게 처음엔 조금 기이했다.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뭔가에 홀린 듯이 행복했던 것이다. 무엇이 우리들을 이토록 행복하게 하는지는 아직은 몰랐다.
조금 앉아 있으려니 문화제가 시작됐다. 내 생전 그런 신나는 문화제는 처음이었다. 무대도 없고 꾸밈도 없고 짜임도 없고 순서도 없었다. 그 동안에 나는 먹고 살면서 동시에 ‘얄라궂은’ 소설까지 쓰느라고 거의 20년을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었던 거였다. 하춘하의 ‘영감 왜 불러’를 아주 멋드러지게 부르질 않나, 개그의 원조 만담과 재담이 나오질 않나, 느닷없이 락뮤직이 흐르질 않나, 꽹과리에다 징에다… 난리도 아니었다.
와아, 밤은 그렇게 왁자지걸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비는 내리고 나는 준비해간 우산을 움켜쥐고 앉아있었다. 빗물이 흐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라도 배와 가슴과 머리만 안 젖으면 하룻밤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이었다. 허리 아래로는 이미 다 젖었지만 예상대로 잘 견뎌지고 있었다. 아니,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50년 동안의 습관을 이기기는 무리였다. 밤에는 잠을 자야 했던 것이다. 문화제는 난리도 아닌데 나는 우산을 움켜쥐고 앉아 잤다. 순간순간 잠이 덮쳐 내 우산 지붕이 내 몸과 함께 기우뚱 기울다가 거의 바닥으로 꼬꾸라질 쯤에야 화들짝 잠을 깨는 거였다. 몇 번 그 짓을 반복하다 보니 이게 또 재미가 붙는 거였다.
“와---- 아---- ” 경찰이 막고 있다는 쯤에서 함성이 들렸다. “뭡니까” 옆사람께 물었다. 차벽을 뚫어야 85크레인에 갈 수 있거든요. 나는 그제야 내가 왜 이렇게 기이한 노숙을 해야 하는지 돌이켰다. 내 돈 내고 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 온 까닭을 상기했다. 그 크레인 위에서 몇 달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하고 내려온 거였다. 그 사람이 꼭 옛날 처녀시절 공장에 함께 일했던 친구만 같아서, 정부미 아껴 먹으며 라면을 특별식으로 삼으며 함께 자취를 했던 친구만 같아서,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내려온 터였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을 일터로 돌려보내겠다고, 만약 동료들을 일터로 다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쇳덩어리 탑에 올라가 있으니까, 보다 많은 사람이 이를 알고 지켜봐주면 그 소원이 더 빨리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
차벽은 높고 견고했다. 우리는 새벽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끝내 차벽을 뚫지는 못했다. 아침이 왔다. 비가 드디어 그쳤다. 날씨는 더웠다. 지치지도 않고 우리는 다시 문화제를 열었다. 문화제를 보면서 배가 고프면 돼지국밥을 사 먹었다. 꿀맛이었다. 값이 싸서 그랬던 모양, 한 그릇에 천원. 국밥을 먹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행복한 이유를. 내가 올바르기 때문에 내가 행복한 거였다.
그리고 덤으로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내 친구 김진숙이 나를 참으로 알뜰히 행복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걸.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차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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