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어릴 때 부모는 자식의 재능을 발견해주기 위해 기꺼이 ‘오해’를 일삼는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뒤집기만 조금 빨라도 ‘내 아이가 엄청난 운동신경을 지녔구나. 운동선수로 키워야 할까’ 싶고, 좀 우렁차게 울면 ‘목청이 남다른걸 보니 가수가 되려나보다’, 돌잡이 때 연필만 잡아도 ‘내 아이는 학문을 길을 걸어 박사가 되려나보다’ 싶은 그런 즐거운 오해들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부모님의 기억 속 어린 우리들은 저마다 수 가지의 재능을 가졌던 팔방미인일 것이다.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온통 피아노와 함께인 채다. 나는 7년 정도 피아노를 배웠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가 될게 아니면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니 공부에 전념하라셨다. 피아니스트가 되는 길 말고도 가진 재능을 뽐낼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었음을 어머니도 나도 잘 몰랐다. 그 무렵에는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피아노학원에 한번쯤은 다녀보고, 때가 되면 그만두곤 했었다. 그만두고 나서, 내가 초견과 청음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별 무리 없이 항상 됐으니까 남들도 다 가지고 있는 능력인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능력을 써먹을 곳은 딱히 없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크게 남아, 그 작은 능력이 무척 절대적으로 느껴져 원망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졌긴 하지만, 비범하게 피아노를 잘 치는 영재도 아니었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능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지는 않는다. 타고난 재능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 하는 이들은 질타를 받는다. 중요한 것은 부족한 재능을 만회해보려는, 주어진 재능을 열심히 갈고 닦으려는 열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떠나보낸 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그를 놓칠 수 없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을 만한 열정이 떠나간 것이다. 내 것이 되지 못한 열정이 떠나간 자리엔 꿈이 자리했다.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고,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불완전한 우리들은 그렇기에 꿈을 꾼다. 이게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재능일거라곤 확신하지 못한 채로 글을 쓰기 시작한 나는, 언젠가 음악잡지를 만드는 꿈을 꾼다. 문장하나 멋들어지게 만들어내지 못해 좌절을 맛볼 때에도. 어머니가 “네 글 쓰는 재능이 더 뛰어난 걸 발견해서 글에 집중하게 하려고 피아노를 그만두게 한 거다”라며 너스레를 떠셔도 눈감아 드려야지 하며. 행여 ‘꿈이 떠나가네’ 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될 날은 오게 하지 않으리라는 열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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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