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지(城址)를 진주호국성지(護國聖地)로
진주성지(城址)를 진주호국성지(護國聖地)로
  • 최정호 지역기자
  • 승인 2013.11.2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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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5일 지역 부동산 업계 및 대전일보 보도에 따르면 사적 154호로 지정된 충남 현충사 경내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고택과 10만㎡규모의 문화재보호 구역내 토지가 법원 경매에 나와 이충무공 탄신 463주년(4월 28일)을 앞두고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지나간 기사 내용을 다시 한 번 거론 하고자하는 뜻은 두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순신 장군 고택 등 문화재 보호구역 토지가 어떻게 관리 되었기에 경매에 나왔는가 라는 것이고, 둘째는 진주성지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는 무엇 때문에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는 가이다.
이순신 장군은 사사로운 가문의 인연이나 한 문중만의 충무공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충무공의 나라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이나 전과에 대하여 이일이 논거치 않더라도 충무공의 고택, 무술 연마를 했던 궁터, 아들 이면의 묘, 장인, 장모의 묘소가 있는 문화재 보호 구역이 경매에 나왔다는 것은 국가존속과 우리 모두를 있게 한 민족의 뿌리를 경매에 붙인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 이 민족 모두의 성지가 법원 경매에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할까? 현재 덕수 이씨 종회에서 낙찰 받아 관리는 잘 하고 있다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런 내용을 정리하면서 진주성지에 대하여 유추해 보면 진주성은 어떠한 상징성을 갖고 있는가?
신라시대부터 축성된 성으로 전해오나 임진왜란 1차 2차 전투를 빼놓을 수 없고,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그 품성과 전략, 대승한 전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김시민 장군은 왜적의 공격에 대비해 모든 백성을 성내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해 성내의 군사가 많음을 적진에 보이도록 했다.

성민들은 돌, 기왓장, 짚단 등을 준비하여 민·관군의 합심 총력전과 김시민 장군의 신출귀몰한 용병술 전략술로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작심하고 싸워 대승한 전투다.

권율의 행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김시민의 진주대첩으로 이어지는 3대첩의 통쾌한 승리였다.
이로 인해 왜적이 노렸던 호남의 곡창 지대를 보존하고 선조 임금을 비롯한 조선군 의병들에게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우는 계기가 됐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조선에도 난공불락의 성과 강력한 조선군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두려워했다라고 기록됐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은 올곧은 선비정신, 전투시에도 항상 성민과 함께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솔선수범의 정신, 숫적인 열세와 병기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승리로 이끈 군사 전략가로, 죽기로 지켜야만했던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의 정신, 오로지 전란에 처한 이 나라와 백성만 생각했던 애국 충절의 정신이 깃든 거룩한 호국성지(護國聖地)이다.

특히 한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 1위가 진주성이라 하지 않던가?
찬란한 문화의 터전 장렬한 충렬의 이야기가 간직되어 있는 곳 위대한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 삼장사의 충혼이 숨쉬고 7만 군,관,민이 애절하게 순절한 장엄한 이곳, 충남 현충사와 같은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진주 성지에서야 없겠지만 관계당국의 특별 관리를 통해 유적지와 유물 문화재가 보존 관리되어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소중한 터전이 마련되어야 하리라 본다.

이런 중차대한 일들이 충절의 고장을 수호하는 길이요 역사의 도시를 완성하는 길이며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고 나약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목숨을 바쳤던 충신열사들의 거룩한 뜻을 기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진주성지(晋州城址)를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로 표기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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