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12.17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

 
나를 아끼고 사랑하듯 남들도 아끼고 사랑하며 상호신뢰를 회복하여야한다. 인격의 가장 높은 완성은 타인을 즐겁게 해주는데 있다. 새해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고 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지난 한해를 돌이켜보자. 우리들의 일상사는 반복적이면서도 일회적이다.

지난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도 하지만, 과거와 똑같은 반복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회일기 (一會一期)라 한다. 우리들 앞날의 걸림돌은 과거의 잘못된 업(業)때문이다. 현재의 모든 고통은 지난날의 무거운 업보의 결과이며, 이것을 차단하는 방법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참회뿐이다. 과거에 걸어온 길이 아무리 잘못되었더라도 지금부터 반듯하게 걸어가면 된다. 악업(惡業)의 장애는 참회로써만 재거되는 것이다.

새 출발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에 대한 모든 잘못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강한 비판과 참회가 반드시 필요하다.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너나없이 정신적 양식을 흡수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함양하도록 하자. 정신이 살아있어야 병도 이기게 되고, 정신이 꺽 이면 희망도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사회에는 종적기능과 횡적기능이 있다. 이것이 종횡으로 잘 작용될 때 이상적인 사회가 건설된다. 직장이나 학교, 시장을 오가는 것은 종적기능이다.

남을 돕고 길을 쓸고 반상회를 하는 것은 횡적기능이다. 현대인들은 종적수행은 잘한 반면 치지도외(置之度外)라서, 횡적기능은 마비되어있다. 남의 일에는 무관심하여 세대간, 이웃 간, 빈부 간, 노사 간, 남북 간, 여야 간, 사제지간의 모든 횡적기능이 마비되어있다.

유명인들 사생활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뉘 집에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어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를 때까지 이웃도 모르는 살벌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무관심은 옆구리에 찔린 가시처럼 아픈 것이다. 협동정신 활성화를 위해 위인들의 발자취와 재치능력과 지구력이 담긴 양서를 모든 가정에 비치하도록 하여 전 국민이 하루 10분씩이라도 책을 읽도록 독서운동이라도 전개해나가도록 하자. 그러면 남에 대한 단절된 무관심의 비극을 최소화하여 횡적의식을 고취시켜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는 없는 것이 없는 무엇이든 생각한 것은 다 있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의리와 신의는 실종되어버린 것이 안타깝다. 치러야할 댓 가는 크게 치루고 받아야할 댓 가는 적게 받는 연습을 하자. 서로 양보하는 자세로 상대에게 우선권을 주는 연습도 하자.

자기자로만 재며 어긋났다 추궁하고 화내고 공격하면서 갈등만 일으키지 말고, 10년 후를 내다보고 나무를 심고, 100년 후를 내다보고 교육을 심어보자.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꾸준히 의식구조와 정신적 개선책을 찾아내어 고질병을 스스로 고쳐나가자.

전인적 인격을 기르고 보급해나가야 한다. 나만의 이익과 출세, 일확천금의 병폐도 치유해나가자. 서로에게 관심 갖고 배려하며 다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을 열어나가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마음의문을 열어주어 그들의 가슴에서 행복의 불꽃이 피어나도록 협동하자. 그들에 대한 가장 큰 죄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 하는 것이다.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경제적 부유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자. 전 국민이 활짝 날개를 펴고 웅비할 수 있는 올바른 각성과 치열한 노력을 경주해나가도록 하자. 서로의 아픔과 번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며 행복하게 사는 길을 열어가자. 지금부터 파괴된 공동체를 복원하여 서로가 기댈 언덕이 되어주고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주며 서로의지하면서 살아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