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걸/울산 새부산 콘크리트 회장·한국문인협회 회원
지금부터 60년전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가난 속에 먹고 산다는 그 자체가 지금은 상상을 할 수 없는 무서운 형벌같이 냉혹한 혹한의 추위 같았다.
옛말에 “3일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 세상에 무엇이 서럽다하여도 배고픔을 참아내는 서러움 보다 더 큰 서러움은 없다”고 하였다.
가난한 그때는 너무 가난하여 아이들을 남의 집에 보내거나 어린 나이에도 머슴살이를 보내거나 나이어린 딸을 시집을 보내거나. 첩살이를 보내기도 하였다니 입 하나 덜게 하는 것도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였으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실제 이산가족 찾기에서 보면 6·25전쟁으로 인한 전쟁 미아나 고아도 있지만 남의 집에 보내진 사실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식을 가르치지 않고 어린나이에 생업에 뛰어들어 고생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라 지금 75세 이상의 나이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 직후의 경제 사정은 일제 앞잡이나 일부 지주가 독점하고 있는 경제력은 소작농으로 매달린 경제 구조에 쌀이 경제 가치 기준이 되었으며, 관계시설이 없는 시절이라 흉년이라도 되면 굶어 죽는 사람도 생겨나고 민심도 흉흉하였으리라, 조실부모하고 인척 집에 살아야하는 아이의 설움은 어떠하였을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머슴살이로 전락한 아이의 미래는 운명을 맡겨야하는 바람 앞에 등불 같았으리라!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건강하게나마 자라날 수 있었으리라. 일찍 자원하여 해병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군에서 배운 운전기술이 재산 1호요 능력이었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책가방을 들고 중학교에 다닐 때 군 생활을 했고, 동무들이 공부할 때 일을 했으니 배움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가슴이 쓰리고 아팠을까? 일찍 군 필을 하였으니 일찍 결혼을 할 수 있었고 지혜롭고 부지런하며 착함이 넘치는 아내를 맞이하여 따뜻한 희망의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다. 이때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건자재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가수요가 일어났으며, GMC는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뛰어난 사업 감각은 미래를 보는 지혜로움 이였다. 야산을 개간(開墾) 하고 울타리를 치고 돼지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시대적으로 농경사회에서 공업국으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변하기시작하여 새로운 수요가 일어났으며, 당시 섬유와 고무신공장 목재공장이 가수요에 힘을 입어 주력산업으로 사회와 국가 경제를 이끌어 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막걸리 또한 돼지고기의 수요가 엄청나게 일어나 농장에도 신바람이 났으며, 이때가 도약의 기회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농사를 짓기 위한 논이며 밭이 모두 주거지로 바뀌고 땅값은 폭발적으로 값이 올라갔다. 자고나면 돈이 늘어나니 그 돈을 알뜰하게 재투자하였다.
저작권자 © 경남도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