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우당 이회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2.06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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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우당 이회영(1867.3-1932,11)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 부귀영화를 결연히 떨쳐버리고 조국독립에 일생을 바치셨던 애국자이며 혁명가이셨다. 현재 시가로 환산하여 약 600억원에 달하는 서울 명동 1만평의 땅을 모두 팔아 6형제(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와 40여명의 가족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오르셨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

선생은 삼원보에 경학사, 부민단,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 등을 세우고 독립군 장교 등을 양성하였을 뿐 아니라, '흑색공포단'이라는 무장 투쟁 단체를 만들어 비밀 결사적 무장 투쟁을 전개하셨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인 분임을 우리는 가슴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6형제의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 한양 에서 이분들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삼한갑족(우리 역사상 가장 부유한 귀족)'의 집안이라는 말도 이회영 형제를 일컫는다. 즉 조선 최고의 귀족이셨는데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이 나라의 조국광복을 위해 애쓰시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돼 조국에 성재 이시영 혼자 돌아 왔다. 선생은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외면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직접 해결하고자 고난과 역경의 길을 스스로 택한 고귀한 책임의식을 가지신 분으로 이 시대 우리 지도자들이 가슴깊이 반성하며 새겨야 할 것이다.

선생은 약관이 지나면서부터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려 하였는데 봉건적 인습이 팽배해 있던 시기에 아전과 노비 등에 대한 차별적인 낮춤말을 높임말로 고치려 하셨고 적서의 차별을 없애고 개가와 재혼을 장려하였을 만큼 평등주의자셨다. 개인의 자유는 물론 국가 간의 완전한 독립과 평등의 권리도 강조하셨다.

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 하셨으며 그 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했듯이 노구를 무릅쓰고 만주군 사령관의 암살을 단행하시다가 체포되시어 1932년11월 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 66세를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십니다.

일제치하 우리의 선열들은 피나는 애국정신과 항일정신으로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고자 목숨을 걸고 싸우셨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번영과 풍요는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모두 포기한 채 오로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을 걸고 이 민족을 지켜주신 선열님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 덕분이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과 국혼을 지키시고자 헌신하신 선열님들의 거룩한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내는 것이 후손된 마땅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사 마저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역사교육을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바른 정체성과 민족혼을 심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사교과서 문제로 정신을 못 차리는 우리 스스로가 조상님들 보기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백 년 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목숨을 걸고 헌신하신 선열님들의 뜻과 정신을 바로 계승하는 것이 국혼을 바로 세우는 일이며 이 땅위에 국혼이 바로 설 때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혼도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올바른 역사교육
일본은 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망언, 위안부할머니들의 가슴에 박힌 못을 빼 주지는 못할망정 더 큰 대못을 박고 있다. 우리 스스로 올바른 역사교육으로 친일을 청산하여 국혼을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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