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추억이 있는 '경주'
어린시절 추억이 있는 '경주'
  • 한송학기자
  • 승인 2014.02.2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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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자체가 문화재...새로운 감동 선사
▲ 경주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삼국 중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신라의 1000년 수도가 경주다. 도시 자체가 문화재인 곳이다. 뭣 모르고 들렀던 경주는 조금 더 나이를 먹고 가면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된다. ‘여기에 이런 것들이 있었나’라는 말을 거듭 뱉어낼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정문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종이 보인다. 신라 33대 성덕왕이 죽자, 경덕왕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리 12만 근(72t)으로 종을 만들려고 했지만 당대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아들 혜공왕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종을 완성했다. 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이다. 완성된 종은 19t으로 원래는 봉덕사에 있다가 영묘사, 경주읍성 남문 밖, 동부동 옛 국립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박물관 정문을 나와 길을 건너면 월성이다. 경주 월성(사적 16호)은 신라 5대 파사왕 때 축성한 왕궁이다. 지금은 소나무 숲과 잔디밭만 남았다. 월성은 초승달 모양 지형으로 남쪽에는 남천이 흐르고, 동·서·북쪽에는 해자를 만들어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해자로 쓰인 연못은 다 메워지고 없지만, 남천은 아직도 월성 남쪽에 흐른다. 아름다운 솔숲을 산책하다가 조선 시대에 만든 석빙고를 만난다. 월성 산책로는 계림으로 이어진다.

경주 계림(사적 19호)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와 관련 있는 곳이다. 신라 4대 탈해왕 때 호공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금궤가 있어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직접 그곳에 가서 금궤를 내려 덮개를 여니 사내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성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고 했다. 금궤가 있던 숲은 원래 시림이라고 했는데, 이후 계림으로 불렀다. 계림에 있는 비는 순조 3년(1803)에 세운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졌다.

계림에서 선덕여왕 때 건립된 첨성대를 지나 대릉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대릉원(사적 512호)은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고분군이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유명하다. 천마총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이라고 추정한다. ‘삼국사기’ ‘지증왕 편’에는 ‘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말이 있다.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의 신(新)과 그 뜻이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의 라(羅)가 합쳐져 국호 ‘신라’가 탄생한다. 대릉원은 일출지로도 유명하다. 일출은 주로 바다나 산꼭대기에서 보는데, 고분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다. 월성과 대릉원 첨성대 등이 있는 경주 역사유적지구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원화로를 따라 남쪽으로 1.4km 정도 가다 보면 선덕여왕릉(사적 182호)이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했다. 황룡사구층목탑 공사의 총감독은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수가 맡았고, 탑은 백제인 아비지가 만들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신하들에게 죽을 자리를 알려준 일화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은 자신이 모월 모시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그곳에 어딘지 몰라 다시 물으니 낭산 남쪽이라고 말했다. 그날에 왕이 진짜 세상을 떠났고, 신하들은 왕이 예견한 대로 그 자리에 장사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당시 도리천은 그곳에 없었다. 훗날 문무왕이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때야 선덕여왕의 신령함이 더 위대하게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여왕릉에서 약 1km 거리에 신라 26대 진평왕의 능이 있다. 대를 이어 왕을 지낸 아버지와 딸이 죽어서도 남촌 들녘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셈이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1.4km 거리에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의 묘(사적 21호)가 있다. 그곳에서 약 3km 거리에 김유신 장군과 처남 매부 사이였던 신라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의 능이 있다. 경주 무열왕릉(사적 20호)은 신라의 능 가운데 주인이 정확하게 알려진 몇 안 되는 능이다. 능 앞에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는데, 비석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았다. 머릿돌 중앙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있다.

태종무열왕릉 위에 자리한 고분은 경주 서악동 고분군(사적 142호)이다. 태종무열왕릉 옆 선도동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삼층석탑이 나오고, 그 뒤편 선도산 자락에 신라 24대 진흥왕릉(추정)과 그의 아들 진지왕릉(추정) 등 고분 여러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진지왕의 조카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이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바다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사적 158호)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며 화장해서 동해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화장해서 지금의 수중릉에 뿌렸다. 신문왕은 화장한 아버지의 뼛가루를 품고 모차골을 지나 산을 넘어 기림사를 거쳐 지금의 봉길리 해변에 도착했다. 봉길리 해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길이 20m 바위섬이 수중릉이다. 바위섬 가운데 조그만 수중 못이 있고, 그곳에 길이 3.7m, 너비 2.06m, 두께 0.9m의 화강암이 놓여 있다. 신문왕이 682년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감은사를 짓고, 감은사 금당 밑에 특이한 공간을 만들었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된 아버지가 감은사 금당까지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문무대왕릉과 봉길리 해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이견대다.

왕에게 가는 길을 다 돌아봤으면 신라밀레니엄파크에 들른다.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 크기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위용을 자랑한다. 드라마 ‘선덕여왕’ 세트장은 포토 존으로 인기다. 영화 ‘관상’, 드라마 ‘대왕의 꿈’ 등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신라인들이 신분에 따라 살던 집도 볼 수 있다. 항아리 분수가 있는 토우공원, 도자기 체험장, 금속공예, 들꽃 공예, 목공 체험 등 아이들이 체험할 거리가 많다. 인형극 ‘호낭자의 사랑’과 그림자극 ‘석탈해’도 볼 만하지만, 백미는 말을 타고 무예를 펼치는 마상 공연 ‘화랑의 도’다.

▲ 선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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