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4.03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기원전 4세기말경에 키프로스의 키티온 출신인 제논이 그리스 아테네에 들어와 철학을 공부하고, 에피쿠로스와 거의 같은 시기인 기원전 3세기에 독자적인 철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곳이 주로 “스토아(stoa)”라고 불리던, 기둥들이 열 지어 서있는 한 공공건물의 복도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시국가로서의 독립을 상실한 아테네에서, 그것도 외지로부터 흘러 들어와 정착한 제논의 철학도 역시 에피쿠로스와 같이 시대적인 풍조를 반영해서 개인주의적이고 도피주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친 학문체계와 이론은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판이하다.

제논에서 비롯된 스토아학파는 약 500년 가량 이어졌는데, 이 기간을 보통 세 시기로 나눈다. 기원전 3세기를 초기, 기원전 2~1세기를 중기, 기원후 1~2세기를 후기로 본다. 이 세 시기 중 스토아학파의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에 대한 대부분의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은 제논이 활약한 초기였다. 그러나 이때의 저작물은 중세를 거치면서 모두 산일되어 1차 사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고, 2차 사료만 빈약하게 남아 있어 전체를 복원하기는 어렵다. 중기, 후기의 것은 주로 윤리학에서, 그것도 실천 이론에 한정된 논의와 저술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19세기까지는 별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해 왔으나, 20세기에 수리논리학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명제논리학(命題論理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논리학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토아학파는 “세계는 로고스와 질료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로고스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질을 규정하고, 질료는 로고스에 의한 규정을 받아들인다. 각각 존재하는 것의 질료는 세계 전체의 질료의 일부이고, 성질은 로고스에 의한 규정의 일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질을 지닌 질료, 즉 물체이다. 물체는 그 성질에 의하여 다른 물체에 작용해서, 그 작용에 일치하는 결과를 만든다.

공허를 포함하지 않은 이 세계의 인과관계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실제로 있는 세계를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생겨날 세계의 모습 전체를 인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고스의 내용이 모두 실현되었을 때, 세계는 하나의 주기를 끝내고 다시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계를 재현해 간다.

제논은 삶의 목적을 “로고스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했다. 동물의 행동은 충동에 지배되고 있다. 충동은 동물의 자연본성에 유래한다. 자연본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로고스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행동도 충동을 개재해서 로고스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 된다.

로고스적 동물인 인간은, 충동을 언어에 의하여 인식하고, 상황에 비추어가며 추론하고, 결론을 얻어서 행동을 개시한다. 로고스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본성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올바른 추론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 바로 자연본성에 적합한 것, 로고스에 따르는 것이 된다. 로고스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만 할 것을 명하는 자연법이다. 선한 행위라는 것은 정합적인 논리로 설명 가능한 행위이다. 나쁜 행위는 논리성이 결여된 행위이다.

자연본성이 로고스적인 인간이 잘못된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은 파토스(pathos) 때문이고, 파토스는 과도한 충동이다. 따라서 로고스적인 생활이 지향하는 것은 파토스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 즉 ‘아파테이아(apatheia)’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경지를 생활의 이상으로 삼고, 철학적 훈련의 목표로 잡는다.

스토아학파 사상에서 공통된 것은 행위에 앞선 사고의 논리성을 행위 그 자체보다 중시하는 생활방식이다. 초기의 스토아학파는 사고의 논리성을 획득하기 위해 논리학과 자연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후기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중시된 것은 올바른 자기 이해였다. 올바른 추론에 의하여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이다.

금욕주의에서 출발해서 도달한 ‘아파테이아’와 쾌락주의에서 출발해서 도달한 ‘아타락시아’ 비록 출발점은 달랐지만 도달한 곳은 결국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는 점에서 같은 곳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