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라는 이름의 권력
제도라는 이름의 권력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5.1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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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요즘 세상에는 업적이니 실적이니 성과니 평가니 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심지어는 대학교수들에게도 이것이 적용되어 소위 성과급이니 성과연봉이니 하는 것들이 현실적인 제도로서 시행되고 있다. 모든 제도들이 다 그렇지만, 아니 세상만사가 대개 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의 양면이 있다.


교수사회는 이 제도가 지닌 수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반발하고 있지만 그 반발은 관료사회와 언론들의 강고한 벽 앞에서 그다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제도가 상호약탈적 비인간성에 기초한 보수체계라는 교수사회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고, 상호경쟁을 바탕으로 성과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관료와 언론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문제는 결국 어느 쪽 주장이 현실이 되는가 하는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칼을 쥔 관료 쪽과 언론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형국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현대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중에 미셸 푸코가 있는데 그의 핵심적인 철학개념 중에 ‘권력’이라는 것이 있다. 권력이라면 우리는 보통 정치권력을 떠올리지만, 푸코는 현실과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그런 소위 ‘죽음의 권력’ 말고 우리들의 삶의 맥락에 편재하는 소위 ‘삶의 권력’이라는 것을 지적해 보여준다. 지식이라는 것도 그중 하나다. 예컨대 돈을 벌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이 꼬박꼬박 회사로 향한다면 발걸음을 그리로 향하도록 명령하는 돈의 권력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우리가 식탁에 앉는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는 밥의 권력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또 우리가 온갖 정성을 다해 연애편지를 쓰고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사랑의 권력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런 예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 취지는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세계에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이른바 삶의 권력, 그 권력의 그물망이 쳐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그의 지적이 정말로 진리중의 진리요 기발한 철학적 탁견이라고 감탄한다.

제도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권력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구속하는 것이니 실로 막강한 권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모든 교수들도 결국은 그 권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피부로 느껴진다.

그런데 어차피 따를 수밖에 없는 명령이라면 그 명령이 조금이라도 ‘합리’에 가까운 것이기를 나는 바란다. 이를테면, 교수들에게 요구되는 소위 ‘성과’라는 것이 요즘은 ‘논문’이라는 것으로 대표된다. 그런데 논문이라는 이 학문의 형태가 모든 종류의 학문분야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학문들의 성격차이가 깡그리 무시되는 것이다. 소위 이공계통이나 사회과학에는 그것이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전통적인 ‘인문학’에 이러한 틀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물론 인문학에서도 언어학이나 역사학 같은 분야는 논문이라는 것이 전형적인 학문형태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인문학의 삼대분야중 하나로 평가되는 문학과 철학의 경우는 논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작품’이다. 그 작품의 형태도 또한 다양하다. 시도, 에세이도, 소설도, 희곡도, 시나리오도 모두 다 그런 작품의 형태들이다. 보통 사람들도 문학에 대해 그런 것을 요구하지 논문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는 않는다. 외국문학전공이라면 무엇보다도 ‘번역’이라는 형태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제도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제도의 기본방향이 명백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의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인문학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논문보다는 저술에 가중치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이미 2600년 전부터 실로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로 그 성과가 발표되었다.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철학을 ‘시’의 형태로 발표했고, 소크라테스는 논문은커녕 오로지 ‘문답’이 전부였고, 플라톤의 철학은 대화 내지 희곡의 형태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고백’의 형태로, 몽테뉴와 파스칼은 ‘에세이’의 형태로, 헤겔은 백과사전의 형태로, 마르셀과 키어케고어는 ‘일기’의 형태로 철학을 표현했다. 몇 년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철학사 책 ‘소피의 세계’는 소설과 영화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장자’가 우화의 형태인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의 제도대로라면 이런 대작들은 소위 ‘성과’ 내지 ‘업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거나 아주 낮은 점수밖에 받지 못할 것이다.

제도는 권력이다. 그 제도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그것은 그들의 삶이 된다. 제도의 결정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까닭이 거기에 있다. 전공자들끼리도 서로 읽지 않는 따분한 논문의 양산을 강요할 게 아니라, 대학교수들이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기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제대로 된 학문적 결과를 ‘작품’으로서 향유할 수 있도록, 이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제도들이 하루 속히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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