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6.05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홍암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나 1916년 황해도 구월산 三聖祠에서 일제의 학정을 꾸짖고 민족의 미래를 예언한 예언 시와 유서를 남기고 향년 54세에 선도수행의 폐식법으로 숨을 멈추고 혼을 띄워 순국하셨다.


홍암 대종사는 1905년 러·일전쟁 승전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국운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7년 3월25일에 을사5적의 주살을 도모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1904년 나철은 호남출신 청년지사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고 1905년에는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등 국운이 점차 기울어 가자 나철은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제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대미외교활동(對美外交活動)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또한 4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였다. 나철은 평화적인 외교활동으로는 도저히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투쟁방향을 전환하여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을사5적 처단거사를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이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이 강탈되어 반 식민지화된 근본 원인은 첫째 사대주의 사상에 있다고 단정 민족의식을 고취하여야만 된다고 확신하였으며, 둘째로 한국의 독립은 몇 사람의 정객이나 지사, 열사에 의한 대일 민간외교 또는 매국노 암살 등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로지 거족적으로 대일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구심체, 즉 자주독립사상이 있어야겠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홍익인간 정신으로 국조인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가 절대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 종교는 대일 투쟁에 참여할 저변 인구를 확대하면서 국가가 망하더라도 민족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지속적 대일 투쟁의 무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하여, 나철 선생은 스스로 제1대 교주가 되어 1909년 1월 15일에 국조 숭배사상을 고취하고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념을 종단의 구현 목표로 삼아 예로부터 있어온 단군교를 대종교로 중광 하였는데, 겉으로는 종교를 표방하였으나 어디까지나 고유한 민족의 전통철학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총력을 집결하여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바로 우리 민족 신앙의 교리 안에 우리의 민족사상과 철학이 있음을 만 천하에 알렸던 것이다. 따라서 대종교의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고, 강력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자연적으로 독립 운동가들은 대종교를 믿었다.

그리하여 많은 독립지사와 투사들이 사상적, 철학적인 무장을 하고 잔인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자주 독립을 위해 빛나는 투쟁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김좌진의 청산리대첩, 홍범도의 봉오동 대첩 등의 승리와 김구선생의 임시정부의 광복군 활동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한민국 건국이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독립 인사들이 실권(失權)하면서 친일세력과 외래종교를 기반으로 한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족정신이 흐려져 지금까지 사대, 식민사관속에 우리는 헤매고 있다. 하루빨리 우리의 홍익정신을 회복하여 세계정신 지도국이 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