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수를 채우고 서로를 보듬어주며 위로하자
평형수를 채우고 서로를 보듬어주며 위로하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6.2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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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곤섭/경상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요즘은 여름이라고는 하나 일교차가 아주 크다. 이와 비슷하게 대한민국의 여름 또한 ‘뜨거웠다 써늘했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이 그랬고, 문창극 총리지명자에 대한 언론과 여당 야당의 반응들이, 그리고 임병장 총기사건 그리고 무엇보다 브라질 월드컵 축구경기의 결과에 따른 열기 또한 ‘뜨거웠다 써늘했다’를 반복하고 있다.

다시 거론하기 좀 뭣하지만, 세월호 사건만 해도 그렇다. 초기의 구조 입장에서 그 큰 배에 평형수가 필요한 만큼 채워져 있을거라고만 생각하며 그 큰 배가 넘어갈 것이라 어느 누가 속단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생명보다 자신의 이익들을 더 챙겼다. 해운사는 평형수를 빼 내가며 과적했고, 공무원은 허락했고, 선장은 도망쳤고. 이는 다들 남의 생명을 무시하고 자기의 이익만 바라는 가치관의 결과들이 아닌가.

우리 사회를 거슬러 돌아보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적 가치관이,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가치관이 각각 그 시대의 평형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가치관이란 것이 많이 사라져 그저 많은 이들은 금전적 지상주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것 같다. 소통이란 것도 화합이란 것도 필요할 터이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선장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평형수를 채울 겨를도 없이 그저 나만 챙기며 나아가는 것만은 아닌지 염려된다.

우리는 최근 여러 마리의 소를 잃은 것 같다. 소를 잃고 훗날을 위해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직장이든, 국가든 고치려면 우리 스스로 평형수를 잘 채우고, 윤리적이고 방향성을 지닌 선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르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잘 나아갈 수 있으리라.

현 사회에 빗대어 보면, 방향성과 윤리성이란 바로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자신의 이익 추구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내 자신의 이익이 먼저가 아닌 너, 그리고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평형수를 원 상태로 채운 것과 같은 입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물건 하나라도 사게 되면 그 안에 사용설명서가 들어있다. 우리는 대개 그 사용설명서는 내팽개치고 무작정 제품을 먼저 만져본다. 그리곤 오랜 시간이 걸려 제품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거나, 아니면 뒤늦게 제품설명서를 다시 찾아보곤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제대로 사용하려면 사용설명서를 먼저 익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교육이며 공부인 것이다. 공부는 삶에 필요한 설명서를 익히는 기간이다. 교육 또한 필요성을 느끼고 목적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 목적성의 교육이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런 가치관이 우리 삶의 평형수가 되고, 우리 사회의 평형수가 되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우리 교육환경이 심히 우려된다. 공부를 해서 미래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또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배워야 할지는 중요치 않다. 점수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작정 점수 올리기,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행태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평형수를 뺀 세월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챙길 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역지사지의 마음들을 좀 더 가질 수 있는 공부와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매 순간 되물어야 한다. 내 삶의 평형수가 무엇인지, 또한 나의 삶은 우리사회의 평형수로 잘 작동하고 있는지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늘 평형수를 가득 채우고 서로를 보듬어주며 위로하며 상대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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