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언어(中國言語)와 문자(文字)의 발전과정(發展過程)(Ⅱ)
중국언어(中國言語)와 문자(文字)의 발전과정(發展過程)(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7.0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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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중국 언어와 문자의 발전과정에 대해 계속 알아보자.

문자가 어느 특정인에 의해서 창제되었다는 독단도 여기서는 성립될 수 없다. 더구나 문자 이전의 오랜 전설을 배경삼은 문자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인류의 지혜에 의한 단체사회의 부산물이니 말이다. 다만 그를 계통있게 정리한 작업은 필요했다. 여기서 그 문자의 정리작업에 공적을 세운 이를 찾는 일이 남았지만 많은 자료가 창힐(蒼頡)에게 그 공을 돌리고 있다. 비록 ‘상서(尙書)’의 공안국(孔安國) 서(序)가 복희(伏羲)씨에게 기원을 두고 있는 외에도, 혹은 주양(朱襄), 혹은 범(梵)·창힐 등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만 모두 창힐설보다 보편화되지는 못했다.

‘순자(荀子)’ 해폐편(海蔽篇)에 “일을 좋아하는 자가 많았지만 창힐이 홀로 전한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편(五蠹篇)에 “창힐이 글자를 만들다”, ‘설문해자서’에 “창힐이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다”, ‘광운(廣韻)’ 구어(九魚)에 “저송과 창힐이 글자를 만들다” 등등.

이상에서 창힐의 문자 제작은 제작이라기보다는 문자의 획일적인 정리임을 밝혔거니와 한자가 초보적으로 정리를 본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창힐의 생존 연대를 밝혀야겠다.

‘여씨춘추’와 ‘세본’에는 “사황이 책을 짓다(史皇作圖)”라 했는데, 사황은 황제(黃帝) 때의 사관(史官)인바 사황을 창힐로 가정한다면 창힐은 황제의 연대인 기원전 2665년에 재세(在世)했던 것으로 간주되니, 이로 미뤄보면 벌써 4600년 전에 여러 사람 여러 지방에서 다원적(多元的)으로 존재했던 한자를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동작빈은 광서 25년에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의 고증을 통하여 중국 한자는 은허에 건도하던 기원전 1394년경에는 이미 회화(繪畫)적인 부호에서 선(線)을 운용한 부호로 진화되었다고 밝혔고, 더구나 갑골문의 배열이 오늘의 한문 배열과 같이 하향식(下向式)이란 점이나, 갑골문의 복사(卜辭)가 동(銅)·석(石)·옥(玉)기와, 사람·사슴·소머리에까지 새겨졌다거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문자의 창조방법으로 예를 든 바 있는 일월(日月)·상하(上下)·고로(考老)·영장(令長) 등의 글자가 이미 갑골문에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갑골문이 성행한 은대(殷代)에는 문자 자체가 이미 원시적인 상형(象形) 역할을 벗어나서 운용(運用)의 시대에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더구나 은대에 갑골이나 동기(銅器)에 이미 주묵(朱墨)을 쓴 흔적으로 미루어 벌써 붓이 있었다는 사실과 갑골문 가운데 ‘책(冊)’ 자로 미루어 당시에 벌써 죽간(竹簡)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문자의 사용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으리라 단정할 수 있으니 한자의 기원은 4600년을 넘어서서 5천 년 전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추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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