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왕손
어떤 왕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7.0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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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황송하게도 나는 왕손을 알고 있다. 방송 드라마나 신문 기사로서가 아니라 내 이웃에 살고 있고 나는 그 사람을 두 가지 이유로 눈 여겨 본다. 한 가지는 보수의 정체를 탐구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인생에 대한 탐구를 하기 위해서이다. 다들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 두 가지 문제는 일면 아주 중요하다. 작가로서도 주요 탐구꺼리이지만 개인적 내 인생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알다가도 모를 이런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선택 때문에 어느새 나라 전체가 이상한 곳이 되어버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도통 구분이 안 가는 분위기가 점점 짙어져간다. 그래서, 탐구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 ‘보수’라고 말한다. 처음 그가 나에게 자기는 보수라고 말할 때 아닌 게 아니라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되면서 마치 그 말을 처음 듣는 듯했다. 신문에서나 ‘읽던’ 말을 실제로 들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너무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시인 아줌마! 나는 말이야 진짜 보수야!!” 그는 내가 분명히 소설을 쓴다고 말해주었는데 꼭 시인이라고 나를 칭한다. 아마도 시인과 소설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듯했다. 그야 어쨌든 진짜라니, 가짜 보수도 있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이 사람이 진짜 보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물론 불쾌감을 동반한 끌림이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불쾌감은 감춰야 한다. 거기다 나는 내 학문과 인생 탐구를 하기 위해서이니 더욱 조심스럽게 속내를 감춰야 했다. 그리고 더 많은 걸 털어놓게 해야 한다. 진짜 보수니까. 그런데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걸 묻지도 않았는데 털어놔 버렸다. 출신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다 보니 그럴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집안의 몇 대 손인지를 만날 때마다 떠들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는데 그는 했던 애기 또 하고 또 하고 했다. 이즘엔 저만큼에 그가 보이면 나는 슬그머니 도망간다.

그는 갓 칠십을 넘긴 해병대 출신 노인이다. 그의 조상 중 한 여인이 구한말 왕비였으니 왕손이 맞다. 또한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잠시 과도기 대통령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연줄로 그의 부친은 건축 설계사 겸 건설회사를 크게 운영했는데 말만 하면 알만한 공공건물을 몇 지었다. 그의 형제들은 빵빵하게 살고 있지만 술을 좋아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경원한다. 그는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직업이 없다는 애기다. 주말이면 알바를 한다. 다행히 나는 주말이면 연대의 장에 나간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자신이 하는 알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

지난 지방선거 약 두 달 전이었다. 빠릿빠릿한 새 군복에 군모를 쓰고 으스대며 나타났다. 군복이 커서 소매를 둥둥 걷은 팔을 휘휘 저었다. 휘젖는 팔 위에 닻과 해골이 그려진 빨간마크가 선명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라가 잘 살려면 이거, 이거를 찍어야 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았던지 ‘첫번째 칸에 도장을 꼭 눌러야 한다니까!!’ 하며 쾍 소리를 질렀다.

이웃사람들은 그런 그가 돌아가고 나면 말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군복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가 또 군복을 입고 동네를 왔다갔다 하길래 군복이 멋있다고 일부러 칭찬을 했다. 그랬더니 자신의 얘기에 열중한 나머지 그 군복이 ‘하사품’이라고 실토해버렸다. 어디서 하사한 거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핫바자 방귀 새듯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 이웃의 그가 입었던 소매에 닻과 해골 그림이 빨갛게 새겨진 군복을 보고야 말았다. 늦은 시간 지하철 노약자석을 나란히 차지한 세 노인이 젊은 사람들을 힐금힐금 노려보며 젊은 사람들 욕을 해댔다. “아무 천지도 모르고 노인들 무시하는 것들은 아예 선거를 못하게 혀야혀!! 그게 다 종북이지 뭐야, 빨갱이야, 빨갱이!!!” 그러고 봤더니 그 무렵 우리 주변에 그런 군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뿔사, 한 군복노인이 나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정확히는 내 가슴에 달린 세월호참사 위문 노란 리본을 노려봤다. 이내 양 옆의 두 노인에게 나를 보라고 눈치를 주었다. “요샌 여자년들이 더 지랄을 한대나봐, 조렇게 나대면 집구석이 엉망이겄제 … 살림이나 잘 사르!” 그리곤 다행 내릴 곳이었던지 내려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내렸기에 망정이지 큰 싸움 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내리고도 두 정거장을 더 왔어야 내가 아주 무지하고 무식한 할배들한테 모욕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신이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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