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서양
동양:서양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7.1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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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동양:서양? 그런 것이 지금 있기나 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년간 미국 하버드대학에 방문교수로 체재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특강이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철학의 형성-동양:서양’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는데 뜻밖에 여러 미국인들이 이 특강을 들으러 왔다. 나중에 느낀 바지만, 아마도 이 타이틀의 전반과 후반이 각각 절반씩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질의 토론 시간에 한 금발의 청년이 ‘동양과 서양이 문화적 차이를 넘어 서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취지의 질문을 해줬을 때도 나는 어렴풋이 그런 호기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그때 ‘나 자신이 이미 그런 것처럼 오늘날은 사실상 서양과 동양의 구별이라는 것이 애매해졌고 따라서 동서의 구별을 넘은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던 것 같다.

내 생각은 그렇다. 특히 우리 ‘동양’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른바 ‘동양’이 거의 ‘서양화’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시대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부터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양인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생각해보라. 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면 오히려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본다. 그 점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국가 주석도 일본의 소위 텐노도 서양식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보이지 않는 정신 속이라고 그다지 다를 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유치원시절부터 서양식의 커리큘럼에 따라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조차 한자는 몰라도 영어는 안다. 피타고라스도 알고 뉴턴도 안다. 우리 세대만 해도 동서의 아무런 구별 없이 포스터의 노래를 학교에서 배웠고, 신사임당과 윤두서는 몰라도 고흐와 르누아르는 알고 자랐다. 사춘기의 우리 정신을 장악했던 것은 헤세의 데미안과 괴테의 베르테르였었고 암울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의 저항을 부축인 것은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이었다. 조금만 깊숙이 분석해보면 우리의 안과 밖이 속속들이 서양화되어 있음을 그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석가모니와 공자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우리사회에서 그 그림자가 옅어져가고, 또 그만큼 우리가 ‘서양’이라 부르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지분을 넓혀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 구별은 거의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사용을 비롯해 그 증거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거의’라는 말을 좀 강하게 발음하면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보고 싶다. 그것은 아직도 ‘동양적인 전통’이 일부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아직도 ‘서양화되지 않은’ 혹은 ‘되지 못한’ 부분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워하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성’이라는 것이야말로 ‘서양적인 것’의 핵심이라고, 핵심중의 핵심이라고 나는 파악한다. 바로 이 이성이라는 것이 2600년의 세월을 거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서양을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가 서양으로부터 들여와야 할 수입품목 중 최우선순위가 바로 이 ‘이성’ 내지 ‘합리성’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것에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이성이 소리 높여 외쳐온 ‘정의’라고 하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한심한 세태들인 것이다. 소위 ‘관피아’를 비롯한 온갖 비리들…. 부정을 방조하는 이상한 제도들…. 이젠 입에 담기도 조금씩 지쳐간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도 선진국은 되고 싶어 한다. 과연 가능할까? 나는 지금으로서는 좀 회의적이다. 그러나 희망은 버리지 않고 좀 기다려볼 참이다. 사람들이 숲과 건축에 관심을 갖고, 좋고 나쁨, 옳고 그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아마 그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 공항에 나가봤는데 오늘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었다. 어디를 가고 어디를 다녀오는지. 나는 그들이 가방 속에 화려한 면세품들을 챙겨오는 대신 그 머릿속에 혹은 그 가슴속에 무엇보다도 서양적인, 제대로 서양적인 저 ‘이성’이라는 것을 좀 챙겨오기를 주문해본다. 언젠가 있을 제대로 된 선진국 ‘대한민국’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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