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선봉-의열단
독립운동의 선봉-의열단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8.2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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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1919년 거족인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더욱더 악랄한 방법으로 통제와 억압을 가해오자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기게 된다.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무력 투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義烈團)이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고문은 김대지, 황상규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의 단원과 단장에는 밀양출신 약산 김원봉이 맡았다. 일제가 얼마나 의열단을 무서워했으면 김구보다 약산에게 현상금이 더 붙였겠는가?


의열단은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테러집단이 아님이 ‘공약10조’와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에 잘 나타나 있다. 파괴대상으로는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고, 7가살은 조선 총독과 이하 고관·일본군 수뇌·대만 총독과 대만 총독부 고관·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매국노를 살상의 목표로 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1923년에 작성된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서’는 지금도 도올 김용옥을 비롯한 많은 식자들이 명문장임을 인정할 정도다, 그 첫 문장이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에는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 항일투쟁의 현장 역사기행
해마다 선열들의 인간사랑, 나라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약산 장학회와 (사)석정 윤세주 기념 사업회에서는 밀양지역 고등학생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상해-가흥-남경-무한-한단-섭현-석가장-북경으로 이어지는 장거리의 역사기행을 실시해오고 있다. 올해도 지난 7월 말 35명이 태항산 항일 투쟁지역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의열단 중에서 석정 윤세주 열사는 의열단장과 밀양 고향 친구로 1942년 6월 3일 중국 팔로군과 합세하여 태항산에서 일제의 소탕전에 대항하여 싸우다 진광화, 좌권 과 최후를 맞았다.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했으며, 우리나라 국립묘지급인 중국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혁명열사능원에 아주 귀하게 모셔져 있다.

열사의 구국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정부에서는 천안 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에 탄생 110주년을 맞아 2011년 6월 24일 어록비를 세웠다.

약산의 부인 박차정 여사 또한 대한민국의 여성 독립운동가로 부산의 역사적 인물로 선정되었다. 박차정 의사는 1910년 동래 읍에서 출생하여 1929년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12월 광주학생운동과 부산조선방직공장 파업에 주도적인 인물로 지명되어 서대문경찰서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 1월 병 보석으로 풀려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의열단장과 결혼, 부녀복무단장으로 활약하다 1939년 중국 장시(江西)성 쿤룬(昆崙)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에 어깨를 맞아 중상을 입은 뒤 1944년 5월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셨다. 현재 밀양에 산소가 있고, 동래 고등학교 옆에 생가도 복원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천안, 안동, 밀양에 독립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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