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과 함께하는 삶
난(蘭)과 함께하는 삶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8.2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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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수/경남수필문학회 회원·한국문인협회 이사
 

중국 남부가 원산지로 동양란의 일종인 옥화(玉花)가 꽃대를 올리기 시작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꽃봉오리 세 송이가 달려 있다. 엊그제 아침에 한 송이가 피더니 저녁 무렵에 또 한 송이가 피고 다시 저녁에 마지막 한 송이까지 피어 세 송이가 모두 피어 빼어난 아름다운 자태에다 은은한 향기까지 번져오니 여름 나기가 한결 가볍기만 하다.


공자는 일찍이 난의 향기를 일컬어 ‘왕자의 향’이라 했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 뿜는 난은, 오래 전부터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어 왔다.

모든 사물에는 스스로 내는 방향(芳香)이 있듯이, 난에는 난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향이 있다. 향은 그 물체가 내는 품위를 말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사람을 가리켜 도(道)를 지킬 줄 알고 도를 깨우친 사람이라는 말들을 하게 되는데, 이는 도를 아는 사람일수록 향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서둘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느낌만으로도 그 사람의 됨됨이나 진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경우를 우리들은 종종 볼 수 있다.

난은 향만이 아니라 다른 식물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조화로움을 지니고 있다. 긴 잎과 짧은 잎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공존하는 법칙이 있으며, 주위의 모든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고 있다. 두 사람 간에 서로 마음이 맞고 교분이 두터워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 날 갈 만큼 우정이 깊은 사귐을 두고 흔히 금란지교(金蘭之交)라 말기도 한다. 단단하기가 황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의 향기와 같은 사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난은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고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다. 급히 서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깊은 산속 강한 햇살을 피해 반 음지에서 고고한 자태로 있거나 아니면, 화분에 담겨져 사람의 손에서 자라면서 묵화에서 느끼듯이 긴 세월 동안 사랑을 받아 왔다.

땅이나 화분 속에 뿌리를 내리는 난이 있는가 하면, 따뜻한 남쪽 지방 해안가 바위나 나무에 착생하는 풍란이나 석곡이 있다. 그 옛날 사공이 풍파에 배가 파선이 되어 끝없이 표류를 하던 중, 풍란의 향기에 취해 잠에서 깨어나 육지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지네발란도 상록의 착생란(着生蘭)의 일종으로 역시 동양란에 속한다. 생김새가 마치 지네가 기어가는 모습을 닮았다하여 지네발란이라 부르는데, 지금 우리 집 베란다 창가에는 이 지네발란의 꽃 잔치가 한창이다. 3년 전 우연히 지인의 집에 들렀다가 얻어 온 것으로, 빨래판 정도 크기의 자연석인데 평평한 돌 위에 뿌리를 밀착한 채 밤하늘의 별무리가 금시라도 쏟아져 내릴 듯이 지금 절정을 이루고 있다.

긴 침묵 속에 은둔과 끈기로 가을과 겨울을 넘기고 봄을 맞이하더니, 쌀알 크기 정도의 핑크빛 꽃무리가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내 눈을 현란하게 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 지네발란을 가리켜 하늘의 별이라 했다. 갑자기 별무리가 한꺼번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따금 창가 틈새로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과 엷은 햇살, 분무기로 뿌려주는 물뿐인데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토록 척박한 환경인데도 참고 견디며 의연한 자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강한 생명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걸까.

너무나 작은 꽃이라 흐릿하고 가물가물하여 내 시야에 들어오기까지는 확대경으로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보일 듯 말듯 앙증맞고 귀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잎이라야 겨우 7~8mm 정도로 손가락 마디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니 잎과 잎 사이 겨드랑이에서 꽃을 한꺼번에 피워내고 있음을 본다.

날 듯 말 듯 한 향이라 그런지 더욱 은은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우리네 사람도 그렇게 강렬하지 않아도 은은한 인간다움이 묻어나는 알게 모르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정겨움이 솔솔 풍기는 그런 삶, 은둔과 끈기로 때를 기다릴 줄 알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지네발란 앞에서, 새삼 사람 살아가는 이치와 정도(正道)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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