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에 계절 바뀜을 생각하노라
처서(處暑)에 계절 바뀜을 생각하노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8.2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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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3일 전(양 8월 23일·음 7월 28일) 처서라는 절기가 지나갔다. 여름 내내 눅눅해진 책이며 옷가지를 볕에 내다 말리는 쇄서폭의(曬書曝衣)의 계절이다. 더위를 치운다. 더위가 수그러진다는 처서에 모기도 입이 비뚤어져 모진 성화를 그친다는 절기다. 하늘은 벌써 조각구름이나 뭉게구름이 높이 떠 있으며 공기는 한결 맑아졌다. 태양은 눈에 띄게 쇠(衰)해졌다. 고향 묘소에 벌초를 언제쯤 해야겠다고 계절 바뀜을 살피어 본다.


별안간 천지가 맑아지고 쓸쓸해지고 소슬스러워졌다. 그렇다고 허무한 것도 아니다. 깊은 산속 숨어 있는 조그마한 암자(庵子) 같은 곳이 가고파진다. 곧 단풍구경으로 온 산하에는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산 짐승들이 긴장하게 될 것이다. 늘 오고가는 것이긴 해도 계절의 변화보다 매혹적인 기적도 없다.

두보(杜甫)의 ‘강촌(江村)’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밀(靜謐)하고 긴 여름 낮이 있다. 맑은 강 휘어 마을 안고 흐르고, 긴 여름 강마을 일마다 한가롭다(淸江一曲抱村流 長夏江村事事幽)…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이는 바늘 두드려 낚시를 만드네(老妻畵紙爲棊局 稚子鼓針作釣鉤). 가을이라기엔 아직 이르고 여름이라기엔 너무나 신선하고 맑은 오후, 지금 이맘때 모습이다.

시인 박성룡(朴成龍:1932∼2002)은 ‘처서기(處暑記)’에서…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천지를 울리던 우렛소리들도 이젠·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위 소리로·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파닥거리는 시늉으로·들리게 마련이지만·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저 우렛소리가 산맥을 넘고·설레이는 벌레 소리가·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나는 잠이 들겠다. 고 노래했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lkner:1897∼1962)는 8월 중순을 지나면 갑자기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날은 신선하고 햇빛은 유달리 밝고 찬란하다. 아직 따갑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여성적 빛이다. 이 빛을 제목 삼아 장편 『8월의 빛』을 썼다. 주인공 토 크리스마스는 살인을 저지른 대가로 거세된 뒤 평화롭게 주변을 응시한다. 욕정과 폭력이 뜨겁게 난무하는 삶의 복판, 여름을 지나 생의 언저리, 가을 초입에서 인생을 지혜롭게 보는 눈을 얻는다.

소설가 신경림(申庚林:1936∼)은 ‘처서기(處暑記)’에서… 여름 들어 나는 찾아갈 친구도 없게 되었다. 사글세로 든 시장 뒤 반찬가게 문간방은·아침부터 찌는 것처럼 무덥고 종일·아내가 뜨개질을 하러 나가 비운 방을 지키며·나는 내가 미치지 않는 것이 희한했다. 때로 다 큰 집 쥔 딸을 잡고·객쩍은 농지거리로 핀통이를 맞다가·허기가 오면 미장원 앞에 참외를 놓고 파는·동향 사람을 찾아가 우두커니 앉았기도 했다. 우리는 곧잘 고향의 벼농사 걱정을 하고·떨어지기만 하는 소 값 걱정을 하다가도·처서가 오기 전에 어디 공사장을 찾아·이 지겨운 서울을 뜨자고 별러댔다. 허나 봉지쌀을 안고 돌아오는 아내의·초췌하고 고달픈 얼굴은 내 기운을 꺾었다. 고향 근처에 수리조합이 생긴다는 소문이었지만·아내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어린것은·백일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웃지 않았다. 처서는 또 그냥 지나가버려 동향 사람은·군고무마 장사를 벌일 채비로 분주했다. 라고 읊기도 했다.

지난 주말 요란하게 비를 뿌리더니 그날로 창문을 닫고 자야 하는 서늘한 밤이 거짓말같이 찾아들었다. 유리잔처럼 말간 하늘을 보면서 찬탄과 함께 얼마나 혼탁함 속에서 숨 쉬고 살아왔나를 새삼 깨닫는 계절이다.

마음을 내려놓아라! 는 불가(佛家)의 가르침, 방하착(放下着)의 때이기도 하다. 여름내 지고 온 탐욕이며 분노, 어리석음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가볍게 정신을 맑게 할 만하다.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완전한 성취, 도피안(到彼岸)까지는 아니라도 미혹(迷惑)한 중생(衆生)들의 차안(此岸)을 응시할 수만 있어도 계절이 어김없이 바뀐다는 것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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