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심(殘心)·잔향(殘響)
잔심(殘心)·잔향(殘響)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9.2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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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殘 : 해칠 잔·죽일 잔·멸할 잔·잔인할 잔·쇠잔할 잔·허물 잔, 무너뜨릴 잔·탐할 잔·미워할 잔·남을 잔(잔존함)·턱찌끼 잔(먹다 남은 찌끼)·재앙 잔·삶은 고기 잔.


心 : 마음 심·염통 심·가슴 심·가운데 심·근본 심·별이름 심·성(姓) 심(성의 하나). 響:울림 향(진동하는 소리)·울릴 향(소리가 진동함)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는 글자이다. 그러나 사전에 찾아보면 “잔심”이나 “잔향”이라는 용어는 설명이 없다.

궁도(弓道)에서는 화살을 쏜 다음에 한참 동안 화살을 잡고 있던 자세를 풀지 않는다. 활을 쏜 다음에도 활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 쏠 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과녁을 응시한다. 이것이 선(禪)의 세계에서 말하는 잔심이다. 잔심은 미련을 남긴다든가 마음에 걸린다든가 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다도(茶道)에서는 차를 마시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릴 때보다 마시고 난 다음에 찻잔을 내려놓을 때를 더 조심한다. 이것도 잔심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늙은이 들이 생의 마감을 느끼게 되면 “저 어린 것들을 남기고 내가 어떻게 세상을 떠날 꼬!…”남은 자식이나 손자들의 앞날을 걱정하고들 한다.

요즈음의 음악에서도 아날로그의 녹음이 아니라 디지털의 녹음, 디지털의 연주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디지털 이란게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면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따스한 연주가 아니라 기교에만 편중된 연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연주나 음악에는 잔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이란 잔향이 오히려 매력을 더 가미해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연주자의 대부·바이올린의 왕자·20세기를 빛낸 바이올리스트라 불리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 국적을 가진 아이작 스턴(1920∼2001)이 일본의 갓 세워진 어느 음악 홀에서 연주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일본의 한 음악비평가가 그에게 음악 홀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물론 그의 입에서 최신식으로 설계된 음악 홀을 격찬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음악이 아니라 대포를 쏘는 곳으로 쓰는 게 좋겠소.’스턴의 대답이었다. 대답의 의미는 잔향이 전혀 없는 그 음악 홀이 스턴에게는 몹시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마지막 코드를 치고 난 다음에도 손을 잠시 허공에 그냥 들어 올린 채로 여음이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는다. 지휘자는 연주가 끝난 다음에도 한참 동안 지휘봉을 들어 올린 채로 여음을 즐기듯 서 있는다. 이처럼 음악은 악보가 끝난 다음에도 끝나지 않는 것이다.

채근담에 보면 「성긴 대숲은 바람이 불어오면 소리를 내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소리를 남겨두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아있지 않는 숲속의 바람이 지나간 소리를 들으러 산으로 간다.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음악을 들으러 돈을 내고 음악당을 찾지만 자연의 숲 속에 일어났던 바람소리의 잔향은 남아 있지도 않은데 그곳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는다. 이것이 인간과 자연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시 인간보다는 자연이 더 매력적이다! 원감국사(1226∼1293)의 한가로운 시 한수가 잔향을 남긴다. 옛 사찰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숲은 무성한데 해는 더욱 길구나. 푸른 이끼 섬돌에 끼고 새로 나온 대나무는 담을 넘으려 하네. 비는 파초의 푸른 잎을 적시고 바람은 작약 꽃향기 전하네. 앉아있기 지루하여 산보하노라니, 소매 끝에 서늘한 기운이 이네. 한가로이 살아가니 마음 자족하고 홀로 앉았으니 그 맛 더욱 깊구나. 오랜 잣나무 누각에 뻗어 있고, 그윽한 꽃은 낮은 담장 덮었네. 질그릇 발우에는 한 잔의 차, 비자나무 책상에는 향불이 향기롭네. 비 그친 산당은 적막한데, 툇마루엔 저녁기운 상쾌하다네.

사춘기 때 우리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김소월(1903∼1934)의 시 한편이 잔심과 잔향을 다시 일으킨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시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라시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사람도 만나고 나면 잔심이나 잔향이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포 쏘는 소리만 남는 사람도 있다.

귀뚜라미 소리 짖어가는 이 가을에 오늘도 하루해가 밝아오고 있다. 잔심이나 잔향이 남는 인연을 만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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