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구원들
작은 구원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9.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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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최근에 나는 ‘인생의 구조’에 관한 그 동안의 연구를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페이지 어딘가에서 우리 인간과 인생에 대해 마치 하나의 결론처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불쌍하고 불쌍하며 불쌍하고 불쌍하니 모든 이가 다 불쌍하도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말(“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을 패러디한 것이지만 이 말 자체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절절한 인식임을 숨기지 않겠다. 정말 그렇다. 지존인 대통령에서부터 저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들까지, 남녀노소 있는 자 없는 자 센자 약한 자 가릴 것 없이 인간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과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말이지 불쌍하지 않은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영문도 모르고 울면서 태어나 이 험한 세상에서 온갖 정신적-육체적 고초를 겪다가 좀 익숙해질 만하면 또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불쌍한 인간들…. 그들을 다독여주고 싶은 이런 마음을 대자대비라는 말로 장식할 수 있을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그 불쌍함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뜻밖에도 그 본질의 구조가 단순함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어떻게 단순할까? 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과 그 좌절에서 비롯된다. 좌절은 인간의 절대적인 무능 내지 무력 그리고 불운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은 참으로 묘하다. 그것은 내재적이고도 선천적인 원리에 해당한다. 우리 인간들은 어쩐 일인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또 욕망한다. 아기들이 바라는 엄마의 ‘찌찌’에서부터 이윽고는 소위 말하는 ‘부귀영화’(돈-지위-명성)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바라는 것은 한도 끝도 없다. 그것은 참으로 다양한 변형들을 지니고 있다. 욕심, 야심, 야망, 희망, 갈망, 입지, 포부, 소원, 기대, 뜻, 꿈, 대망, 대원 … 이름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다 욕망인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약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되고 싶어 하는 그 ‘싶음’이 곧 욕망인 것이다. 프로이트나 융이나 라캉 같은 사람은 이것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이런 욕망은 삶의 과정에서 노력이나 운에 의해 성취되기도 하고 혹은 무능 훼방 불운에 의해 좌절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성취는 어렵고 적고 작으며 좌절은 많고 그리고 크다. 우리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는 일이 도대체 그 얼마이던가…. 이러한 좌절들은 그때마다 우리 인간들의 잘 보이지 않는 내면에 그리고 짐작도 할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 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 상처들은 깊이 웅크려 있다가 시도 때도 없이 도지면서 덧나면서 불쌍한 우리 인간들을 아프게 한다. 그게 인생의 정체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참으로 짓궂어서 불쌍한 우리 인간들을 얼레고 달래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우리를 실의와 좌절 속에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자연은 또 한편으로 혹독하고 잔인해서 적지 않은 인간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끝내는 절벽 아래도 밀어버리기도 한다. 불쌍한 그들에게 사후에라도 가호와 축복이 있기를…) 아무튼 참고 견디고 버티다 보면 그 숱한 실의와 좌절과 어려움과 고충을 희석시켜줄 ‘뭔가 괜찮은 일’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는 ‘예술’을 그런 행복을 위한 위로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술은, 이를테면 그림이나 조각 작품이나 건축이나 음악이나 노래나 무용이나 연극이나 그런 것들, 또 요즘 같으면 영화나 연극이나 드라마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제법 쏠쏠한 재미와 함께 잠시나마 우리들의 상처를 잊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자연도 그런 것 중의 하나에서 빠트릴 수 없다. 산이나 강이나 들이나 바다 같은 데로 사람들이 나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맑은 공기나 물을 포함해서 자연이 지니는 아름다움은 나름의 치유력으로 상처받은 인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나마 고마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구원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의 사랑이다. 사람의 삶의 상처에는 그만한 약이 없다. 그러나 그 약도 상처에 발라야만 비로소 약효가 스며든다. 그렇게 바르는 행위가 곧 ‘말’이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곧 약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떠다니는 말들, 언어들을 나는 아픈 마음으로 지켜본다. 살기가 등등하다. 특히 뉴스로 전해지는 정치판의 말들을 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SNS는 말할 것도 없다. 가뜩이나 힘겨운 세상에서 너나할 것 없이 불쌍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인데 이렇게 서로 잡아먹지 못해 난리들이니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어차피 모자란, 그렇고 그런 존재가 인간들인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증오와 저주의 언어들을 거둬들이자. 그리고 한번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던 예수의 말을 떠올리면서 진영이 다른 저편에 대해서도 한 조각쯤은 따뜻한 마음과 말을 나눠주기로 하자.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 끝에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면서 나라의 안정은 물론 세계평화 같은 것도 가능해질지. 불쌍한 인간들의 불쌍한 인생에 그나마 작은 구원이 찾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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