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장례
공자의 장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0.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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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공자께서 병이 나서 하루하루 병세가 악화되자 핵심 제자중의 한 사람인 가장 연장자인 자로가 한 문인을 공자의 가신(家臣)으로 삼아, 그에게 공자가 돌아가신 뒤에 장례 일을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 공자께서 병이 좀 나아져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로가 속임수를 쓴 지가 오래되었구나! 나는 본래 가신이 없어야 하는데, 가신이 있으니 이것은 내가 누구를 속인 것인가? 결국 하늘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신의 손에 안겨 죽기보다는 차라리 제자들 손에 안겨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내가 죽을 때 비록 성대한 장례식은 치를 수 없다 하더라도 설마 내가 아무도 거두어주는 이 없이 길거리에서 죽어야 하겠는가?’ 논어 ‘자로’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로는 공자의 병세가 악화되자 한 문인을 시켜 공자의 가신 노릇을 하도록 했다. 가신을 배치한 것은 만의 하나 스승이 임종할 경우 장례를 치르는 일에 차질이 없도록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몹시 화가 나서 자로가 사기행각을 했다고 직접적으로 나무랐다. 또 “내가 하늘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자로를 간접적으로 나무라기도 했다.

고대사회에서 나라에 벼슬을 하여 녹을 받는 대부(大夫)는 집안에 가신을 둘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공자도 노나라에서 사구(司寇)로 벼슬을 할 때 같으면 가신을 두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벼슬을 그만둔 뒤라 가신을 두어서는 안 되는데, 자로가 멋대로 가신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공자가 월권행위를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공자는 자로를 심하게 나무라며, 자신의 장례가 제자들 손에서 분수에 맞게 조촐히 치러지기를 희망한 것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화려한 장례식을 반대하는 공자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의 장례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공자는 제자 안회를 몹시 사랑했다. 안회가 요절한 후 그를 그리워하며 한 말들이 논어 ‘자한’ 편에 군데군데 적혀 있다.

‘애석하구나! 그의 학문이 전진되는 것은 보았어도 중지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싹은 터도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구나.’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제자였음에도, 공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수레를 팔아 안회의 외관(外棺)을 사주자는 안로(顔路)의 요청을 자신은 전직 장관의 신분이기에 걸어 다닐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공자는 왜 안로의 요청을 거절한 것일까? 그것은 공자가 장례란 무조건 화려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신분과 처지에 맞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에 넘치는 화려한 장례를 반대한 공자의 정신은 후일 유학자들에게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전승되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70세 되던 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일주일 전쯤부터 자신의 신변정리에 들어갔다. 먼저 자손들을 시켜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본인에게 반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작성하도록 하였는데, 그 첫 번째 조항은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간소하게 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조항은 묘 앞에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 다른 직함은 일체 쓰지 말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후면에 간단한 세계(世系)와 행적을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돌아가는 날 아침에 시자를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도록 하고, 유시(酉時)가 되자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한 다음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율곡 이이 선생은 1584년 정월 16일 49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우거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다른 이의 수의(襚衣)를 얻어다가 염습(殮襲)을 했을 정도로 검소한 장례식을 치렀다.

1만8000~40만원 하는 중국산 수의를 300만~1500만원짜리 국산 수의라고 속여서 팔아 74억을 챙긴 국내 유명상조회사 때문에 1만9000명이 피해를 입었고, 상조회사 대표 등 관련자 205명이 입건되었다는 보도를 보니 이런 수의를 판 사람은 장사꾼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입고 불속에 들어가는 순간 한 줌의 재를 이런 고가에 사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 이 땅에는 하루하루 폐지를 주워서 5000원 정도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허리 굽은 늙은이들이 1500만원을 벌려면 8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는 것을 아시는 지요? 이러는거 아닙니다. 지하에 계시는 공자·퇴계·율곡 선생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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