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의 저편
이분법의 저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1.0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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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창원대 교수·철학자

철학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일종이 묘한 이분법이 온갖 사유의 저변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저 오래된 코스모스와 카오스(질서와 혼돈)를 비롯해, 존재와 무, 에피스테메와 독사(진지와 억견), 이데아와 개물, 에이도스와 휠레(형상과 질료), 에센티아와 엑시스텐티아(본질과 존재), 정신과 물체, 사유와 연장, 관념과 경험, 단순관념과 복합관념, 원인과 결과, 단자와 세계, 본체계와 현상계, 물자체와 현상, 종합판단과 분석판단, 자아와 비아, 만족과 고통(행복과 불행),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동적 종교와 정적 종교, 필연과 우연, 의식과 무의식, 창조와 진화, 의미와 지시체, 노예도덕과 주인도덕 … 하여간 한도 끝도 없이 많다. 이러한 이분법은 현대 프랑스철학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중심과 주변, 시네피에와 시니피앙, 문자언어와 음성언어, 모던과 포스트모던 등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굳이 이러한 구별을 감행하는 데는 아마도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구별과 대립이 사태의 객관적 실상이라고 그들은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구별들은 참 묘하게도 은연중에 어느 한쪽을 편들고 있음이 드러난다. 적어도 어느 한쪽에 방점이 찍히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현대 프랑스철학에서는, 이러한 구별들이 곧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는 현상을 부각시키면서 예를 들면 야만, 비정상, 주변, 문자언어 등을 이론적으로 변호 내지는 방어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철학은 일종의 휴머니즘이자 윤리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철학은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철학들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취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기묘한 불편함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쪽이든 어느 한쪽을 편든다고 하는 것은 다른 한쪽에 대한 일종의 부정과 폄하를 동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정은 어떤 형태로든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아마도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무산계급을 편든 마르크스주의가 단결을 통한 혁명으로써 유산계급의 타도를 부르짖은 일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계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고 20세기를 피로 물들이고 말았다. 또 본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레비스트로스의 철학은 문명을, 푸코의 철학은 정상을, 데리다의 철학은 중심을, 리오타르의 철학은 모던을, 마치 어떤 나쁜 것인 양 몰아세우고 만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외된 요소들을 변호하고 그 이익을 대변하려는 것은 백번 좋지만, 그 반대편을 짓뭉개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소외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문제해결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함께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 조화롭게 함께 공존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모든 요소들이 일괄적으로 어느 한쪽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고 어차피 양쪽이 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면 양쪽은 모두 다 그 존재의미를 인정받고 사이좋게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철학적 공화주의’라 부르고 있다.

작금의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위험천만한 이분법이 사람들을 조각조각 갈라놓고 있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동서가 갈라져 있다. 좌우가 갈라져 있고 상하도 갈라져 있다. 그 각각을 둘러싼 ‘우리’라는 껍질은 너무나 단단하고 그 사이의 벽들은 너무나 높다. 나는 그 껍질을, 그 벽을, ‘철학적 공화주의’라는 망치가 허물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로 포장된 그 치졸한 소아의 껍질을 깨부수고, 모두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자기 몫의 행복을 추구해가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으로, 그 ‘우리’가 거듭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지 않을까.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각자 자기 몫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또한 각각의 쓰임새가 따로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 불과 물은 분명히 상극이지만 그 양자는 다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충분히 공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모습 그대로 인정되면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나는 오늘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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