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할머니와 머위
시할머니와 머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1.0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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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연/경남수필문학회 회원
 

"며늘아 머구 좀 삶아봐라" 시어머님은 머위를 한 소쿠리 부엌에 두고 나가신다. 밥맛이 없다며 아침밥을 제대로 못 드시더니 머위 쌈으로 마음을 정하셨나 보다. 봄이면 담 밑에 씨를 뿌리지 않아도 머위는 돋아난다. 머위는 시댁 식구들이 봄에 식욕을 잃었을 때 입맛을 돋궈주는 반찬 중에 하나다. 삼월 하순쯤에는 제법 잎이 예닐곱 살 아이 손 만한데 이때가 부드러워서 가장 맛있다.


나는 읍 소재지인 동읍에 시집을 왔다. 지금은 동읍이지만 그때는 면 소재지였다. 친정 어른들께서는 '살림도 모르는 네가 어른을 모시고 촌에 어떻게 살래'하시며 걱정을 하셨지만 공기도 맑고 조용한 모습이 꼭 어릴 때 잠시 지내던 고향 같아 자신만만하게 신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넓은 마루는 닦고 돌아서면 먼지가 뽀얗게 앉았고, 부엌에 들어가려면 문지방을 넘어 토방을 딛고 내려와야 했으며, 하수도가 없기 때문에 설거지를 하려면 커다란 함지박에 그릇을 담아 우물까지 들고 갔다. 추운 겨울에는 솜바지를 입고 고무장갑을 껴도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벌벌 떨며 울었고, 여름에는 모기가 떼로 날아들어 팔다리가 성한 곳이 없었다. 또 불 지피는 방법을 몰라 밖으로 불이 내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다.

이렇게 노력하는 마음을 모르고 시어머님은 꾸중하여 친정 어른들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럴 때 시할머님은 "네 시어머니는 잠이 많아 불을 때다, 내어 눈썹과 앞머리를 다, 그슬렸단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너는 잘 하고 있는 거야" 하시며 울고 있는 날 웃게 했다. 항상 집에 계시면서 이웃에 나들이하는 일이 드물었다. 과묵해 말씀은 없었지만 우스갯소리를 가끔 하여 식구들을 즐겁게 하셨다.

가족 중에 외출을 고하면 "단디 해라!" 하시며 심각해지셨다. 그 마음에는 전쟁에 잃은 아들도 있고, 외지에서 공부한다고 나가 병을 얻어 온 자식도 있었기에 누가 외출을 한다면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이다. 밤늦도록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면 반갑지만 문을 선뜻 열지 못하고 반필면 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렇게 아랫사람이지만 감정을 얼른 내놓지 않으시고 배려하시는 모습이 어른으로서의 품위와 절도가 있어 존경했다.

겨울 추위가 다 가고 유채 꽃이 필 무렵이면 상추, 돌나물, 돌미나리, 냉이, 쑥 등이 봄나물이 풍성하게 식탁에 오른다. 그 중에서도 시할머님은 머위 쌈이 제일이라 하시며 어떻게 데쳐야 먹기 좋은지와 머위 쌈을 먹을 때 꼭 있어야하는 강된장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가마솥에 밥이 끓어 부르르 넘을 때 솥뚜껑을 열고 작은 뚝배기에 물을 약간 붓고 된장 한 숟가락과 멸치 서너 마리, 대파 약간, 청량초를 손으로 뚝뚝 분지른 것을 두어 개 넣고 가마솥 뚜껑을 닫은 다음, 불을 약하게 지피면서 뜸이 다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밥을 퍼 담기 전에 꺼낸다. 그러면 밥물이 들어가 짜지 않고 걸쭉하게 된다. 이렇게 머위는 시할머님과 함께 신혼의 추억을 가지고 봄마다 새롭게 돋아난다.

머위가 식탁에 오르면 허허허 웃으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집 온 지 삼십 여 년, 씁쓰레하고 꺼끌꺼끌한 머위 쌈 맛을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요사이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여 어느 철이고 먹을 수가 있지만 제철에 난 것이 아니므로 깊은 맛은 그다지 나지 않는다. 이젠 시할머님은 살아 계시지 않지만 인자하신 인품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삶의 지침이 되어 한 가정의 아내, 며느리, 어머니로서의 처신에 흔들림이 없게 하신다. 시어머님이 놓고 가신 머위를 흐르는 물에 씻는다. 그 작은 잎에 시할머님의 조용하신 모습이 들어 있다. 오늘 저녁 식탁에는 시어머님이 두고 가신 머위를 알맞게 삶아 걸쭉한 강된장을 약간 얹고 할머니의 미소를 듬뿍 얹어 입 안 가득 그리움을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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