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진도와 진도 사람들(3)
2014년, 진도와 진도 사람들(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1.1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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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진도실내체육관 앞마당에는 밤인데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다. 8시 뉴스가 진행되고 몇몇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는데 유가족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얼굴이 둥글고 통통한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기다림의 버스가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 때문에 못 오고 지금 왔다 말씀드리고 여기서 묵을 수 있는지 여쭈었다. 먼데서 오기 힘들건데 광화문으로 가도 되는데 여기까지 오셨네…. 말끝을 흐리며 여기는 실종자 가족만 남고 유가족들은 광화문에 계신다는 것도 전해주셨다.


누구라도 만나 뵈면 드릴 말씀이 많을 것 같았는데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빈 의자에 앉아 TV를 봤다. 왜 대형 스크린을 켜 놨는지 알 것 같았다. 스크린은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상념에서 견디게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미사가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 4대 종교의 의식이 매일 진행된다고 전해주었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미사가 진행되는 부스 양쪽으로 불교 의식과 기독교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불교 의식이 진행되는 부스 뒤에 앉아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빨리 돌아와 가족을 만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아득한 기원이지만 궁극적인 기원인 사악함 없이 행복하기만 한 세상이 되기를 기원했다. 아무리 불행한 일이 자꾸 덮쳐도 행복만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기대를 버리기 싫은 게 평소 마음이다.

다시 마당으로 나와 좀 전 얼굴 둥근 아주머니가 잠 잘 곳으로 손짓한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추울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안은 훈기가 있고 실내 전부에 침구가 깔려 있었다. 이불이 펴져 있는 침구도 있었지만 대개는 반듯반듯 개져 있었다. 마치 금방 잠을 잘 주인들이 올 것처럼. 그러잖아도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울 사람들에게 자꾸 뭘 여쭙는게 정말 죄송했지만 하는 수 없이 얼굴이 둥근 아주머니를 찾아 어디에서 자는 게 좋겠느냐고 여쭈었다. 역시 무표정한 채로 아무 데서나 주무셔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침대에 앉으셨다. 나는 그 아주머니 침구 옆에 가방을 풀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자다가 이를 가는 내 버릇도 걱정되고 무엇보다 낯선 내가 옆에 있으면 그 분이 조금이라도 성가실 거라는 짐작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멀찍이 자리를 잡아 가방을 놓고 다리를 펴고 앉았다. 7~8시간을 버스에 시달려 진작부터 다리가 욱신거렸다.

잠시 있으려니 노란 윗옷을 입은 초로의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일부러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다들 이러고 있지 말고 식당으로 와요, 얘기라도 하고 그러자고! 엉? 그래야 된다구”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앉았거나 누웠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말없이 일어나 아저씨를 따랐다. 나도 얼른 일어나 저도 가도 되느냐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어서 가요.

식당에는 가족들과 친척들이 가지고 온 음료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얼굴 둥근 아주머니 옆에 앉았다. 초로의 아저씨가 어서들 먹으라며, 먹어야 기운들 차린다며 큰 소리로 모두를 격려했다. 대형 스크린처럼 저렇게 큰 소리로 두른두른 말을 하고 말을 하게도 하는 사람들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음료를 마셨다. 그러자 더 배가 고파졌다. 옆의 아주머니에게 혹시 남은 밥은 없냐고 귓속말로 여쭈었더니 없다고 난색을 지어셨다. 나는 얼른 식탁에 있는 다른 음식을 먹었다. 아저씨가 역시 큰 목소리로 “우리 지연이 어머니, 정말 대단하셔, 새벽마다 하루도 안 빠지고 밥을 해다나르니…” 나는 얼굴 둥근 아주머니가 지연이 엄마라는 걸 새롭게 알며 밥을 해서 새벽마다 어디로 나르는지 차마 묻지 못했다.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는가 짐작은 하면서도 어쩐지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식탁 밑으로 손을 넣어 지연이 어머니의 무릎을 쓰다듬어 드렸다. 불쑥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고 슬그머니 식당을 나왔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자원봉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대개 진도 사람들로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의료, 경호, 등, 밤새 교대로 잠자리를 지켜주었다. 아침에 가족식당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자니 대접만 받고 가는 것 같아 몹시 죄송했다. 떠나오며 지연이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이렇게 여기서 묵은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다음 날,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은 실종자를 모두 찾을 때까지 배를 인양하지 않고 수색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고 그 다음 날엔 지연이를 찾았다. 온 국민이 또 울었고, 나는 지연이 어머니가 밥을 새벽마다 어디로 나르셨는지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팽목항 방파제에 밥을 놓는 지연 어머니께 기자가 물었다. “밥 먹고 기운차려서 어서 나오라고요” 지연이 어머니의 울먹이는 대답이었다. 그 밥을 먹고 지연이가 기운을 차려 나온 것이라 여겨지니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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