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지(晋州城址)를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로
진주성지(晋州城址)를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로
  • 최정호 지역기자
  • 승인 2014.11.1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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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화원 발행 2013 통권 제38호 77쪽을 보면 '진주성지(晋州城址)를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로하면...'이라는 제하의 글이 나온다.


필자는 진주문화원 상평동 문화위원장과 문화재연구실장을 맡고 있으며 지난 6일 진주문화원에서 추계탐방을 전남 화순에 있는 충의공 최경회 장군 광주에 있는 효열공 고종후 장군 사적지를 찾았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두 장군은 1593년 6월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무지비한 왜적과 결사항전하다 수적인 열세와 외원이 없는 고립 상태에서 6월의 장맛비에 성벽이 무너져 내리니 전세가 어찌 할 수 없어 천추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남강에 투신 순절한 보국충절 충의의 장군들이다.

화순에 있는 충의사는 최경회 장군 사당을 비롯하여 후실로 추앙하는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암영각, 기념관, 충효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에 있는 포충사는 효열공 고종후 장군의 부친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 종후, 인후의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사당을 비롯한 유물전시관, 내외삼문, 기념관 등이 세워져있다.

이 글을 쓰면서 왜 두 장군을 떠 올리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호남인으로서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위급한 나라를 지키고자 의병을 창단하여 결사항전 끝에 이곳에서 순절했기 때문이고 화순과 광주에 비하여 진주에서의 흔적이 너무 미미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두 곳을 탐방 후 진주인으로서 부끄럽기까지 한 것은 필자만의 생각 이었을까?

지금도 진주성 곳곳에서는 이름 모를 수많은 선열들의 영령들이 무참히도 짓밟히고 비참하게 죽어간 혼백들이 갈 곳을 몰라 하고 허공에 맴도는 것은 아닐까? 그 죽음이 누구를 위함이었고 그 처절한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진주성 1차 전투는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하나 되어 진주대첩을 이루었건만 수많은 민관군의 의로운 희생 없이 대승할 수 있었겠는가?

이듬해 계사년 전투에서 왜적의 총칼 앞에 7만 군관민이 도륙되고 가축까지 땅속에 벌레까지도 초토화되는 참상을 진주성은 생생히 알고 있을 테니 말없는 세월은 400여년이 흘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곳의 진주성 영남이 따로 없고 호남이 따로 없으며 동서가 따로 없는 국난을 당하여 이 나라를 사수하고 이 땅을 지키려했던 오로지 한민족의 동족만이 있을 뿐이다.

왜장을 끌어안고 의암에서 순절했던 논개의 혼이 서리고 충신열사들의 통곡 소리가 7만 군관민의 호곡 소리가 귓가에 들리지 않는가?

이러한 역사와 통한의 아픔을 안은 진주성지가 일부 관광객이나 시민들은 산책하고 쉼터같이 가벼이 여기고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어떠한 곳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돌아가는 모습도 보기가 민망 할 뿐이다.

말로써 형언 할 수 없는 참담함과 글로서 나타낼 수 없는 깊고 깊은 충정어린 이곳을 공원이라 생각하는 이들이여! 역사적 가치의 무지함과 몰상식함에서 하루속히 깨어나소서.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관광객들이여! 우리 선열들의 통곡 소리는 듣지 못할망정 어떤 곳이라는 마음 가짐으로 조금이나 알고나가소.

필자는 가슴에서 솟아나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국난극복의 호국성지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의 역사와 문화의 가치 소중히 여겨 철저한 관리를 통하여 유지보존, 계승, 발굴, 인식의 전환속에 우리 모두의 혼을 담아 호국정신과 얼을 되새겨 진주성지(晋州城址)로 표기된 이곳을 진주호국성지(晋州護國聖地)로 명명 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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