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들의 의미 혹은 개체주의
부분들의 의미 혹은 개체주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1.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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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어쩌다가 다리에 좀 탈이 났다. 병원에도 갔다. 지난번에는 눈에도 좀 탈이 났었다. 그때도 병원에 갔다. 다른 부분들은 다 멀쩡했다. 그런데 멀쩡했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신체의 다른 부분들은 멀쩡한 채로, 그 탈이 난 다리, 탈이 난 눈 때문에 속절없이 그들과 함께 병원에 가야만 했다. 문득 유기체의 철학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들은 유기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한 부분의 상태는 다른 부분의 상태에 의해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그것은 비단 생물학적 유기체뿐만 아니라 모든 유기적인 전체들의 숙명이다.


전체와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관계에 관한 철학자들의 사유는 드물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전체주의란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개인보다 사회·집단·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민족이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 ‘개인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전체, 즉 민족이나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 및 체제’ 등으로 설명된다. 이를테면 히틀러의 제3제국이나 군국주의 일본,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방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 주의가 얼마나 야만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이제 누구나가 다 잘 알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개인들이 국가라는 전체의 광기를 위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나름의 어떤 역사적인 교훈을 얻은 것일까? ‘그렇다’라고 우리는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

사전적인 설명을 넘어서 우리의 사유를 확장해보면, 개인 내지 개체 혹은 부분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넓은 의미의 전체주의(혹은 익명의 전체주의)는 우리들의 생활 곳곳에 잠복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체를 잘 알 수도 없는 어떤 전체를 위해 공무원들은 연금을 대폭 삭감 당해야 한다. 역시 그 전체를 위해 어떤 어린이들은 학교 급식판의 숟가락을 놓아야 한다. 또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유령처럼 숨어 있는 어떤 전체를 위해 국립대학 교수들은 총장 선출권도 내려놓아야 하고 연봉제라는 이름하에 동료들과 살벌한 월급쟁탈전을 벌여야 한다.

좀 철학적인 말이 될 지 모르겠지만 모든 개체들은 각각 그 고유한 최선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런 최선지향은 개체들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최선지향이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는 끊임없이 그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것을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전체’의 무게는 개체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전체라는 것은 바로 개체들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실체라는 것을. 각 기관들이라는 부분들에 의해 신체라고 하는 전체가 비로소 성립되고 국민이라는 개체들이 모여야만 비로소 국가라는 전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개체들은 그런 의미에서 전체에 대한 지분인 것이고 전체를 위한 자격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성전을 세우기 위한 벽돌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그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개체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건강해야 비로소 숲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개체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건강한 정치를 위한 제1원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어떤 세력도 ‘전체’의 이름을 빙자해서 개체의 권익을 함부로 짓뭉개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전체’를 입에 올리는 자들이 실은 ‘전체’ 그 자체가 아니라 유기체의 다른 한 부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이 유기체의 건강한 다른 부분들을 애꿎게도 함께 병원으로 끌고 가는, 그래서 멀쩡한 그들을 더러 같이 병들게도 하는, 어떤 심각하게 병든 부분들, 병든 개체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이런 의미의 개체주의는 다른 부분들, 다른 개체들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이익을 탐하는 이른바 고약한, 얌통맞은 개인주의 내지 소아주의와는 그 철학적 의미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부분들의 건강은 다른 부분들의 건강에 대해 서로서로 필수적인 조건으로 작용한다. A가 좋아야 B도 좋고 B가 좋아야 A도 좋다. 이것이 건강한 개체주의의 대전제다. 이러한 철학으로 나는 ‘우리’라고 부르는 이 전체가 궁극적인 최선의 상태를 지향하면서 건강하게 발전해나가기를 희망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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