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산역에서
도라산역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9.29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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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숙/시인
엊그제 1박 2일로 판문점과 제3땅굴을 다녀왔다.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에다 중학생은 개학이니 1박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 그만 빠지고 싶었다.  당일 아침까지도 주저한 끝에 나선 걸음이었던 만큼 이는 분명 관광(觀光)이 아니라 확실한 견학(見學)이었다.

여섯시에 하동군청을 출발해 점심은 임진각에서 장단콩 비지지게와 두부지게로 먹었다.

그 밥숟가락에는 이산가족들의 가슴을 짓이기는 60년 저 한(恨)의 눈물이 땡초짱아찌로 숨어있었다. 우리가 섬진강에서 임진강까지 가는데 한나절이 걸렸으니 만약 두만강에서 점심 함께 먹으러 여기까지 온다면 그들도 여섯 시간이면 족하겠지.              

“아, 이젠 그만, 서로 맘대로 다니게 좀 해주지! 흩어진 가족들은 맺힌 한 좀 풀고 우리는 기차로 유럽까지 한번 가보게”

도라산 역에서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안내를 받는 동안 여고시절에 본 <닥터지바고>에 나오는 그 기차가 떠올랐다.

역사 입구에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대통령의 사진을 보는 순간 마치 급브레이크를 밟은 자동차를 탔을 때같이 그 앞으로 확 쏠렸다. 김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주석을 만나 두 손을 맞잡았을 때 금방이라도 곧 통일이 될 것 같았던 그날의 그 흥분과 감격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도라산 역에서는 개성. 평양행 기차를 탈 수 없었다.  중국 여행객과 일본 관광객들이 뒤섞여 흡사 인천국제공항 대합실을 방불케 하는 역사를 뒤로하고 안내병의 안내에 따라 공동경비구역인 판문점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예찰하는 망원경을 든 북한경비병이 판문각 정문 기둥 곁에 서있었다.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해전이 터지던 날도 이곳에서 이렇게 훈련받으며 근무를 서야했던 우리의 아들들은 속으로 얼마나 덜덜 떨었을까.

제3땅굴 속으로 들어갈 때 등골이 오싹했다. 이를 맨 처음 발견한 이는 얼마나 놀랐을까. 오늘 우리는 하하 웃으며 똑똑 껌까지 씹으면서 관광 삼아서 구경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날의 주인공들은 한동안 이 굴속에서 인민군 군사들이 줄줄이 뛰어나오는 환상에 괴로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장마전선의 기분은 다음날 강화도 제적봉 전망대에서 망원경에 500원짜리 동전을 여섯 개나 넣고 강 건너 송악산과 그 아래 마을과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는 내내 계속 되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저 괴물로 인해 고향과 부모형제 처자식을 이 지척에다 두고도 잃어버린 세월이 60년이라니!

섬진강에 놓인 남도대교 같은 것 하나만 여기다 만들어 주면 만사가 다 해결 되는데. 아니 이미 이어놓은 도라산 역 개표구만 열어줘도 된다. 무거운 돌덩이 아래 짓눌린 새싹이 옆으로 뻗어 나오는 걸 보면 굳이 농부가 아니더라도 가던 걸음 잠시 멈추고 그 돌을 치워 주고픈 것이 인지상정이아니던가.      

하반신이 마비된 휠체어의 장애인은 단 한번만이라도 일어서서 걸어보는 게 소원이듯이 우리도 하루라도 빨리 끊어진 남북의 허리가 이어져 철도로 육로로 항로로 해로로 자유로이 오갔으면 좋겠다. 정작 남과 북을 나눈 경계선에는 베를린 장벽 같은 철조망도 없는데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변과 그 주변 산야에만 지천에 가시철조망이 뒤덮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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