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는 오롯이 내 인생의 시작과 끝
배구는 오롯이 내 인생의 시작과 끝
  • 글/배병일·사진/이용규기자
  • 승인 2014.12.1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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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필 전 진주 동명고 배구 감독

 
김형필(65) 전 동명고등학교 배구 감독은 대학진학을 위해 배구인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현역 선수시절 한양대학교 배구선수로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됐지만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 후 은사님의 제안으로 동명고등학교 배구부 감독을 맡으면서 수많은 전국대회 우승과 걸출한 선수 배출을 하며 진주 동명고 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진주시민들은 동명고 배구부가 전국대회 우승을 하고 진주시내를 카퍼레이드 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겨날 것이다. 그 현장에 김 감독이 있었다. 진주 배구의 명성을 전국에 알리며 우승제조기, 명 조련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현재 초야에서 배구 후배들을 응원하며 자신의 새로운 미래 개척을 위해 프로골퍼로서 도전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끊임없이 달려가는 도전정신에 응원을 보낸다.


다음은 김형필 감독과의 일문일답.

-최근 근황에 대해 말해 달라
▲2009년 지도자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화려했던 옛 추억을 반추하며 살아가고 있다. 본래 타고난 기질이 정적이기 보다는 동적인지라 지난해에는 프로골프 KPGA 그랜드부문(60세 이상)전국대회 우승을 했다.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쉽지 않은 도전인 것 같은데
▲외람되지만 운동에는 타고난 것 같다.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되짚어보면 스포츠 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신체를 타고 났다고들 주변에서 많은 말들을 들었다. 과거 배구선수로서 활동할 당시, 저의 신장이 배구선수로서 큰 편은 아니지만 점프력과 운동신경만큼은 남달리 좋았던 것 같다.
요즘 100세 시대라고들 말들을 많이 하고 있다. 흔히들 인생 육십부터라고 말한다. 저의 생각은 인생은 60부터, 청춘은 70부터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시간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멈출 수 없다. 그렇지만 항상 도전하고 성취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최초 배구인으로서의 시작은 언제인가
▲1968년 경북고교 2학년 시절이다. 제가 운동은 좋아했지만 공부는 하기 싫어하는 성향이었다. 그래도 대학은 진학하고 싶고 공부는 하기 싫어 선택한 것이 배구이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운동신경이 좋았기 때문에 배구도 눈에 띌 정도로 잘했다. 일반인들보다 서전트 점프가 상당히 좋았다. 배구에 대한 기본기가 부족했지만 배구부 입단 6개월 만에 주전 자리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국가대표로서도 활약했다고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로 진학했었다.
한양대학시절 전국배구대회에서 MVP를 수상하는 계기가 있어 배구 국가대표에 발탁됐었다. 배구선수들은 경기 중이나 연습에 많은 점프를 하게 된다. 많은 연습 등으로 인해 배구 선수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릎 연골에 물이 차는 관절수증이 생기는 부상이 있어 국가대표로서의 큰 활약은 없었다.

-배구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됐나
▲1975년경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낙향하여 동명고등학교 배구부 코치로 부임하게 됐다.
배구부 창단 2개월 만에 경남에서 동명고 배구부를 대적할만한 팀이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게 됐다. 그야말로 경남에서는 동명고 천하였다.

▲ 김형필 진주 동명고 감독시절 1985년 춘계전국남녀중고배구연맹전에서 우승한 선수들.
-배구인으로서 동명중·고 감독 시절을 빠뜨릴 수 없는데
▲1975년쯤의 일이다. 그 당시 신갑용 전 동명중학교 교장님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제가 그분의 중학교 제자였었는데 신 교장님의 제안으로 동명중학교로 부임하게 됐고 그해에 동명고교에 처음으로 배구부를 창단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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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으로 선수 포기 감독으로 전환
하종화·윤종일 걸출한 선수 배출
동명고 배구 전국명성 떨친 산증인

진주 배구의 경쟁력 산파역할 해내
편파판정 주심 폭행·영구 제명도
배구사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인생은 60부터 청춘은 70부터
프로골퍼로 새로운 도전 이어가

지난해 KPGA 그랜드부문 우승
남다른 운동신경 스포츠는 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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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 배구 주심 폭행사건으로도 유명한데
▲1977년이다. 대통령배 중고대회에서 심판을 구타했다는 명분으로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주심의 편파판정이 이유다. 1977년 전국고교춘계배구연맹전 동명고와 청석고의 8강전 경기였다. 1세트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도 배구선수로 국가대표로까지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때의 주심은 분명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판정을 했다고 확신한다. 그때는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최소 3위 입상은 해야 대학 진학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학생들의 장래가 걸린 일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미래가 달려있는일이라 잠시 흥분해 주심을 폭행하게 됐다.

-경기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청석고에 세트스코어 2-1로 역전승했다. 아마도 감독이 없는 상황이라 선수들에 더 강한 동기부여가 됐던 것 같다.
결승진출은 실패했지만 공동 3위에 입상하는 소귀의 성과를 거뒀다.

-현 과기대 김형태 배구감독과 형제간으로 안다
▲주심 푹행사건이 있었던 경기에 저의 동생인 형태가 주전 선수로서 명성을 떨친 경기였다.
대회 3위팀 김형태가 MVP를 수상하는 이변이 있었던 경기다. 이후 김형태는 청소년배구국가대표와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계기가 됐다.

-영구 제명 징계해제는 언제 됐는가
▲영구제명 징계는 4년의 시간이 지난 뒤 1981년 12월 해제됐으며 이듬해에 다시 동명고등학교 배구감독으로  복귀하게 됐다.

-지금도 유명하지만 그 당시 동명고 배구의 명성은 자자했던 것으로 안다
▲1984년 개최된 전국체전에서 우승했던 주역들이 황현주, 김영동, 최태길, 김인석, 강용래, 김양수 등이다.  그때는 전국에서도 동명중·고교배구부의 적수가 없었다. 

-전국대회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매일 로드웍을 시켰다. 학교에서 명석까지 달리게 하기도 했다. 지금은 옛 추억처럼 얘기를 하지만 그 당시 선수로 뛰었던 제자들이 저의 욕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진양호 365계단에서의 체력훈련을 통해 선수들 체력을 향상시켜 나갔다. 평균 신장에서는 열세지만 월등이 앞선 체력을 바탕으로 경기에 임하기 때문에 대회에 나갈 때마다 적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1984년 전국체전 우승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카퍼레이드는 흔한 일이 아니지만 그때 전국대회 우승을 하고 진주시내를 카퍼레이드 할 때 연도에 나온 시민들로부터 열렬히 환영 받을 때가 생각난다.

▲ 지난 1985년 춘계전국남녀중고배구연맹전에서 우승한 경기모습.
-동명고에서 배출한 걸출한 선수가 많이 있는데
▲다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종화, 윤종일이라는 진주를 대표할 수 있는 걸출한 선수가 배출됐다. 이 선수들이 활약할 당시가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진주 동명고 배구를 빛낸 선수들이 많이 있다.

-감독직을 내려놓은 시기는 언제인가
▲2009년까지 지도자 생활을 했었다. 동명고 배구의 전통을 잇고 영원한 전성기를 이어갈 하종화 감독에게 다음을 부탁하며 퇴직을 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프로 골퍼의 생활을 이어 나갈 생각이다. 물론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배구와는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배구는 저의 인생이고 전부였다. 글/배병일·사진/이용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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