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증직 좌승지 참찬관 김태백 장군
진주성-증직 좌승지 참찬관 김태백 장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2.1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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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김태백(1560~1592)장군의 관향은 용궁이요, 자는 계산, 호는 낭선재(浪仙齋)이다.


진주성내 창렬사에 배향된 장군이며 유적지는 옛 진주부의 서쪽 북평리이며 유허비는 하동군 옥종면 추동에 있다.

덕은 송중헌 선생이 지은 비석은 서기 1640년경 지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비제는 ‘선무원종공신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낭선재 김공 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조선조에 들어와 김직은 의릉참봉, 한성판윤을 지냈고 김철은 세종조에 정란의 공으로 호조참판을 증직받았고 김언후는 훈련원 봉사이니 공의 고증조의 삼세이다. 부친은 호조참판이니 김태백 장군은 서기 1560년 6월 5일 태어났다. 김태백(金太白)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기가 있었고 출중했다. 스스로 공부하기를 맹자를 공부하다가 위무로서 능히 굽힐 수 없다고 하는 구절에서 무릎을 치며 감탄하여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했다. 부모를 섬기는데는 효성스럽고 살아서는 물론이요. 사후의 장사나 제사에도 극진한 정성을 다했다. 20세가 못되어 무예가 겸통했는데 말하기를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는 문과 더불어 무로서 했다. 서경에 요임금이 덕을 찬양해 이르기를 문무를 아울러 갖추고 온 세상을 차지했다고 했다. 그러니 문무를 병용하는 것은 오래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했다. 33세때 1592년 임진란을 당하자 집안의 하인들과 동리의 장정들 수백명을 모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관군과 합세하여 힘을 다해 혈전을 벌려 수차 큰 공을 세우고 화살이 다하고 힘이 부족해 싸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삼장사와 더불어 같은 날 촉석루에서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공훈을 기록하여 남기고 여러 차례 증직을 내렸다. 공의 곧고 높은 충절은 정사에 빛나고 그 이름이 사방에 알려 졌는데 오직 공이 탄생한 곳은 오늘에 이르기 까지 땅이 황폐하고 담장이 허물어 졌다. 공의 여러 후손들이 그곳에 돌을 깍아 세울 표식을 삼고자 문중 장노의 명으로 나에게 실기를 주면서 비문을 청한 자는 환철(煥撤)병하(炳夏)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2년 5월16일조에 의하면 ‘경상도 좌병사 최진한이 상소를 올려 임진왜란 시 공이 많은 장군들을 증직해 달라’고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태백 장군도 영조 때 비로소 증직되었을 것이다.


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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