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신사참배
진주의 신사참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2.1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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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신사는 1916년 10월 진주성내 촉석루 북편에 준공됐다. 신사는 본래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의 제사장소로 일본 잡신을 모아 소위 천황에게 태양신이라는 명칭을 더해 섬기는 천조(天照)를 신격화한 것이다.

조선 민족성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표적 황민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에 건립케 했다.
1915년 1월경 진주신사 봉사회를 조직하고 호국 충절의 정신이 확연한 촉석루 북편에 부지를 조성해 대정왕의 즉위일자에 맞춰 터를 고르고 1916년 12월에는 진주신사 건립을 총독부에 청원했다.
진주신사 건립비용 8천여 원을 진주 부호들. 상인들이 부담케 했다. 1917년 1월 준공식 하는 날 조선 총독이 축사를 보내고 일본인 경남도지사는 진주신사 숭모회를 만들어 스스로 회장이 됐다.
1926년 10월 15일 도청이전을 막지 못한 일본인 한 명이 신사 앞에서 권총 자살했는데 진주면민들이 추모비를 세워 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부터 출정 군인. 시민. 학생. 종교인들 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매일신보 1938년 8월 16일자에는 진주군내 기독교 각 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진주경찰서장은 황국신민의 의무를 망각하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부정하는 자가 있을 때 법적 책임을 별도로 하고 어기는 자는 무엇보다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1938년 9월 24일 오후 2시경 진주 기독교 4개파 27개 교회 대표 20여 명은 고등계 형사의 지휘아래 신사 앞에서 동방요배하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1940년에는 진주신사의 총대로 이장* 정태* 정상* 정규* 김동* 이현* 최지* 등이 참여했다.
1941년부터 각종 학교 학생들은 등교 전에 신사 앞에서 손을 씻고 절을 하고 손뼉을 치고 두 번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반대했는데 진주소재 경남성경학교 출신 조용학 전도사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고 같은 성경학교 출신 이현속 전도사는 평양감옥에서 옥중순국하고 최상림 목사도 출옥 6일만에 순국했다.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박성근 목사 등이 4.5년간 옥고를 치르고 조수옥. 이인재. 손명복. 최덕지. 한영원. 박경애. 이봉은. 강문서. 이찬수. 김묘연. 김점용. 강창주. 조경우 전도사(집사)등이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진주신사는 완전히 철거되지 못하고 그 터에 진주 공보관. 시립도서관. 방송중계소로 사용하다 1987년 12월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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