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청 선화당(宣化堂)
경남도청 선화당(宣化堂)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1.0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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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선화당이란 각 도의 관찰사가 일을 보던 정당(正堂)을 말한다. 진주의 선화당은 서기 1895년부터 약 30년간 경남도정의 총본산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선화당의 위치 즉 관찰사의 집무실은 1996년 발굴팀에 의하면 ‘북장대 남쪽 방향으로 보면 수십 개의 비석들이 떼 지어 서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진주 하씨 재실의 동쪽 담장의 일부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선화당은 원래 경상도 낙동강 서부를 군사적으로 관할하던 우병영으로 관덕정 건물인데 관찰사가 부임하면서 선화당으로 변경했다. 관찰사는 각 도에 1명씩 임명되었는데 감사영감이라고 호칭하고 관찰사가 있으므로 감영이라고 했다. 경남 관찰사는 사법·행정·경찰권 그리고 징세권·생사권·인사권까지 소유한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절대적 권력을 가졌다.

‘독립신문’ 1898년 5월 5일자에 보면 지금도 비석군에 포함된 조시영 관찰사는 죄가 없는 강 아무개를 투옥해 재산을 빼앗고 윤모의 딸이 미색이란 말을 듣고 첩으로 보내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윤모를 잡아 곤장을 쳤다고 보도했다.

선화당에서 결정되는 일들이 원성의 대상이 되자 진주농민항쟁 때 점령되었고 또 노응규 의병장에 의해 점령되는 수난을 겪었다.

조선시대 최후의 관찰사 황철이 통감부의 지방장관회의에서 진주도청을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선화당으로 나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관찰사 황철 등은 산청, 하동, 함양 지역을 순회하면서 폭도(의병)들의 귀순을 종용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군대를 해산하는 일을 도왔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후 선화당은 조선 총독부 산하 도지사와 같은 일본사람 도장관이 부임해 헌병제로 폭압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선화당 건물은 수차례 난리를 겪으며 파괴되었다가 1905년경 일본식 일자형 목조로 새로 건립했다. 선화당 앞 영남 포정사 우측에 하마비가 있고 3·1운동 때 3만여명이 운집해 투쟁한 장소로 유명하다.

서부경남 주민들이 도청 이전을 반대하는 상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결사대 까지 조직해 투쟁했으나 1925년 4월 부산으로 이전되고 말았다. 얼마 후 폐가로 변한 건물은 한국전쟁 때 일부가 소실되었다.

1997년에도 선화당을 복원할 계획은 무산되고 현재 경남도 서부청사 건립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낙후된 서부경남 발전을 위해 서부청사 개청에 매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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