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보수 공로자 임배근
촉석루 보수 공로자 임배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1.1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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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촉석루는 해동제일루 또는 영남제일루라고 부른다. 촉석루는 의기 논개의 충절이 서린 누각으로 유명하지만 더 이상의 고상함이 있다.
남강 변 드높이 솟은 촉석루에 오르면 절로 시상이 뜨고 창연한 고색과 웅장한 조형미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일제 때 보물이었고 광복 후 국보였으나 지금은 경남도 문화재 자료에 불과하다. 자료라는 뜻은 문화재가 아니고 비문화재도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창피한 명칭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군 단위 행사에 단체장을 말석에 세운 것과 같은 비상식적 행위로 여긴다.
1957년 1월 19일 제6회 국무회의록을 보면 <촉석루 보수관계보고>라는 제목이 있다. 이는 전쟁 중 촉석루가 피해를 입었으나 기초석과 석문 등은 보존되었다는 그 당시 신문보도와 일치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배례로 국비를 지원받은 진주시와 교육청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간문화재 임배근(林培根)님을 모시게 된다.
임배근 도편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수원에 거주했다. 임배근 도편수는 선친을 따라 일을 배우고 서울 파고다 공원 팔각정을 부자(父子)가 함께 손수 지었다고 한다.
덕수궁을 지을 때 도편수 최백현과 함께 일을 했고 강원도 인제에서 목재를 구해 톱질한 사실도 있다. 그러므로 강물을 따라 흘러 내리는 목재가 진이 빠져 변덕이 없다는 사실도 배웠다.
임도편수는 촉석루 대들보 젓나무를 구하는데 2년 걸린 추억을 가지고 있다. 서양식 집은 30년 지나면 헐고 다시 짓지만 한국식은 수백년간 보존할 수 있다. 그 누가 지혜로운가.
여염집. 불당. 사당 등에 따라 격식이 다르다고 말했다. 초가. 와가. 청석 집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지붕의 형태에 따라 팔작집. 맞배집. 우진각. 사모집. 다각집. 육모정. 팔모정 등으로 나누고 그 외 여러 종류의 명칭이 있다고 말했다.
촉석루를 크게 보수할 때 남아 있던 기초석 옆에 모래를 깔고 물이 괴도록 다지고 그 위에 석회와 백토를 또 다져 처음으로 주초를 놓았다. 나무 기둥을 대신해 돌기둥을 세웠다. 이는 영구적 보존을 위한 돌기둥이라 여겼으나 실수로 판단된다.
기술이 뛰어나도 촉석루와 같은 큰 공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며 영광된 작업이다. 그러므로 촉석루와 임배근은 영원히 떨어 질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촉석루 공사에 동참했던 사실을 자랑했다. 도편수계의 정승으로 호칭될 만한 기술과 이력을 가진 분이다.
인간문화재 도편수 임배근 님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 한이 촉석루 전체에 흐르고 있다.
촉석루 공사가 끝난 다음 낙산사 청룡사 법당을 신축했다고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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