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와 간호사’ 많은 관심과 격려에 고마움
‘파독 광부와 간호사’ 많은 관심과 격려에 고마움
  • 강정배·남해/하일근기자
  • 승인 2015.01.18 18: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해 독일마을 류길자씨(국제시장 속‘덕수’와‘영자’가 사는 곳)

 
최근 전국적으로 극장 스크린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 속 ‘덕수’와 ‘영자’가 사는 곳, 남해 독일마을 내 영화에 영자로 나오는 길자(류길자)씨를 본보가 만나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영화 속 사랑이야기를 봤다. 국제시장 영화에는 조국(대한민국) 근대화를 위해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국제시장 영화에는 이들의 사랑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관람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무엇보다 영화 국제시장 속 덕수와 영자는 영화 속의 이름과는 다르지만 지금 이들은 남해군 삼동면 독일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광부인 덕수는 만나지 못했지만 영자(길자)는 만날 수 있었다. 본보는 파독 간호사로 활동해 온 뒤 남해 독일마을에 거주하면서 독일마을 해설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영화 속 영자인 류길자(70·여)씨를 만나 파독 간호사로 떠난 이유와 독일에서의 생활에 이은 한국의 남해 독일마을로 오게 된 배경에 대해 여쭈어 봤다.

전남 순천시 금곡동 출생인 류 씨는 4남 3녀 중 중간으로 1945년생이다. 해방둥이라고 한다. 류 씨는 간호사의 꿈을 위해 순천도립병원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20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간호사가 됐다. 1966년 학교를 졸업 한후 그해 4월에 독일(파독간호사) 모집에 응시해 3년 계약으로 독일로 떠났다. 이후 류 씨는 3년의 계약을 끝낸 뒤 곧바로 남편이 있는 독일 캘론시로 이동해 70년 현재 남편 헬무트 베르너와 결혼했다. 남편과의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다음은 류 씨와의 일문일답.

-영화 국제시장(“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온 가족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가운데 홀로 쓸쓸히 자기 방에 앉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던지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대사이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면서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없는 우리 시대 아버지 ‘덕수’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 내내 울었던 관객의 눈물샘을 한 번 더 자극한다)을 관람했나
▲했다.

-언제했나. 어느 극장인가
▲지난 13일께다. 진주 mbc다.

-영화 관람 후 솔직한 소감을 이야기 해 달라
▲(솔직해 말해도 되나) 솔직히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감삼적인 것은 갱도 안에서 메탄가스가 터진 것은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 국제시장은 평가 후 점수를 준다면
▲(글쎄다) 50점 정도(?)

-언제 파독간호사로 한국을 떠났나
▲1966년 4월이었다.

-언제부터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나
▲부모님의 권유로 인해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 남해 독일전시관에 기증한 류길자씨가 사용하던 물건들.
-간호사가 적성에 맞았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 같다. 당시 부모님의 권유지만 간호사가 적성에 맞았다.

-파독간호사로 간 이유를 듣고 싶다. 자세하게 이야기 해 달라
▲나는 해방둥이다. 그래서 집안이 넉넉치 못해 돈을 벌어야 했다. 더욱이 우리는 가족이 많았다. 그래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청해서 파독간호사로 지원해 한국을 떠났다.

-계약을 하고 갔나. 몇년인가
▲계약을 했다. 3년이었다.
----------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 영자씨
해방둥이 출신·어려운 집안 위해
파독간호사 지원해 타지생활 시작

3년 뒤 40년간 독일 대학병원 근무
처음 언어 소통 등 힘든 일 많아
당시 남편을 만난게 가장 큰 행복

현재 남해 독일마을서 해설사 근무
파독광부와 간호사 대해 생생히 전달
많은 관심과 격려에 고마움 느껴

----------
-파독간호사로 지원해 독일에서 어떤 일을 했나
▲독일병원의 특등실에서 내과 일을 했었다.

-파독 간호사로 활동을 하면서 생활은 어땠나
▲타지생활이라 외로웠다. 부모님을 비롯해 고향생각 등 많이도 울었다. 그러나 동료들이 함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됐다.

-파독 간호사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지금의 남편(헬무트 베르너)을 만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운동선수들만이 이용하는 치료(진료)실에서 일하면서 이용자들이 저를 많이 좋아해 주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나
▲당시 남편이 아파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그때 내가 간호를 맡았다.

-그때 병원에서 서로 사랑을 하게 됐나
▲그렇다고 보면 된다.

-반면 파독 간호사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이 든 때는 언제인가
▲처음 파독간호사로 갔을 때 3년 계약을 했다. 3년 계약이 끝나자 병원 수간호들이 나를 다른 병원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 한국으로 귀국을 권유했을 때 가장 힘이 들었다.

-3년 후 계약을 마친 후 힘이 들었다고 했다. 누가 힘이 되어 주었나
▲지금의 남편 헬무트 베르너가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언론 등)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 남해 독일전시관 모습.
-파독 간호사로 일하면서 힘이 들지 않았나
▲힘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언어도 소통되지 않아 더욱 더 힘이 들었다. 여기다 대학병원(독일)에서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그때 정말 힘들었다.

-어떤 일이 힘들었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응급환자를 진료하는데 보조를 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심장마비로 인해 병원으로 후송해 온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지 못하면 큰 일이 나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파독간호사로 일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였나
▲지금의 남편인 헬무트 베르너였다.

-왜 그였다고 말하나
▲나를 가장 가까이서 위로를 해주고 사랑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언제 한국으로 귀국했나
▲2010년 12월이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나

▲독일 대학병원에서 지금까지 근무했다. 1969년부터 2009년까지다.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나
▲대부분이 집을 짓는 일에 매진했다.

-집을 짓는 자재 모두가 독일에서 공수를 해 왔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자재 모두가 독일에서 가져와 직접 집을 지었다. 그래서 착공 후 완공까지 무려 5년이나 걸렸다.

-남해 독일마을에는 언제 왔나
▲한국 귀국과 동시에 곧바로 왔다.

-남해 독일마을에 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나
▲독일 캘런시다. 현재 남편과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남해독일마을 생활을 하는데 불편하지 않나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남해 독일마을이 관광지로 급부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고 있다. 이들 관광객들이 차량을 이용하면서 독일마을 도로가 통행에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불편이다.

-독일마을에서의 하루 일상을 이야기 해 달라
▲아침에 기상해 운동을 한 뒤 집안 청소를 마치면 정원을 정리하거나 독일마을 전시관에서 해설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

-해설사로 한 달에 몇번이나 근무하나
▲5~6회 정도 근무한다.

-한국생활에 적응이 되나
▲지금은 조금 적응이 되고 있다.

-한국생활에서 가장 힘드는 것을 꼽는다면
▲언어나 지방풍습이다.

-가족관계는
▲남편 헬무트 베르너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딸이 한국생활을 하겠다고 류 씨에게 이야기 했다고 들었다. 맞나
▲맞다.

-딸도 한국으로 오면 독일마을에 거주하게 되나
▲그렇다.

-류 씨와 함께 같은 집에서 지내나
▲아니다. 따른 다른 집에서 거주하게 된다.

-다른 집이라면 어디를 말하나
▲남해 독일마을이다. 우리 집 위에 이미 부지를 구입해 놓았다. 조만간 귀국을 하면 집을 지을 계획이다.

-딸과 함께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 외롭지 않겠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류 씨는 독일마을에서 어떤 일을 맡고 있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당시 독일 현지에서의 활약상을 이야기 해주는 해설사를 맡고 있다.

-류 씨가 독일전시관에 많은 기증품을 기탁했다고 들었다. 그런가. 어떤 것들인가
▲독일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기증했다. 옷가지나 각종 생활용품, 사진 등 다수다.

-남해 독일마을이 널리 알려졌다. 득과 실을 본다면
▲득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실상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되어 기쁘다. 여기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실생활을 인정해 주며 격려해 주어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실은 마을 앞 도로에 많은 차량들이 통행을 하면서 주민들의 통행에 위험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소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빠른 시일 내에 대책을 세워 주길 바란다.

-류 씨의 독일마을 해설사 역할이라면
▲앞서 말했듯이 독일에서의 광부와 간호사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그대로 관광객들에게 들려 주는 역할이다.

-파독전시관에는 몇 명의 해설사가 근무하나
▲파독광부 2명과 간호사 4명이 해설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만큼 생생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현재 독일마을에서 누구와 지내나
▲때론 혼자서 지낼때가 많다. 그러나 가끔씩 남편과 딸이 다녀가곤 한다.

-남해 독일마을에 거주하게 된 후담을 들려 달라
▲남해 독일마을 건립은 역사를 설명(이야기)해 주고 있다. 파독간호사들이 직접 해설사로 참여해 현실감이 더 있다. 일부 관람객들은 파독 간호사 출신이 직접 해설사로 나서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울기도 하고 감사의 말도 건네기도 한다. 남은 여생을 종요하게 보내기 위해서다.

-김두관 당시 군수가 독일마을을 건립했다고 들었나. 맞는가
▲맞다.

-김 군수가 독일마을 조성을 위해 독일 현지까지 왔다고 들었다. 맞나
▲맞다. 당시 김 군수가 부임 이후 남해에 독일마을을 만들기 위해 직접 독일에 와서 설명회를 가지기도 했다.

-독일마을에 입주했을 때 지원을 받았나
▲잘 모르겠다. 별도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당시 부지 매입 시에는 현 시가보다 다소 저렴하게 받았던 것 같다.

-평당 얼마였나
▲12만원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얼마 정도 하나
▲(한국 사정이 익숙하지 않아) 아마도 10배 정도나 될 것 같다.

-현재 파독광부, 간호사 출신은 모두 몇 명인가
▲17세대, 30여명이 마을을 이루고 산다.

-현재 남해 독일마을에는 파독 광부가 몇명이나 거주하나
▲조용길 씨 등 모두 7명이다.

-파독 간호사는
▲류길자 씨 등 모두 22명에 이른다.

-이 마을(남해 독일마을)에서 맥주축제를 연다고 들었다. 언제인가
▲매년 10월 1일부터 3일간 개최된다.

 
-축제 지원을 받나. 금액은
▲받는다. 예전에는 3000만원이었다가 지난해에는 아마 5000만원을 지원받았던 것으로 안다.

-누구로부터 지원을 받았나
▲경남도와 남해군이다.

-지원금이 부족하지 않나
▲잘 모르겠다. 맥주축제는 축제 회장이 맡아서 한다. 아마도 부족하다는 말을 듣진 못했다.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면
▲한국에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선 뭐든지 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남해 독일마을)서는 해설사 외에는 그다지 할 일이 없다. 그래서 현재 사용 중인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있다. 이 게스트하우스도 7월 중순부터 4주간이다. 이용을 하고자 하는 분을 위해 예약접수를 받는다.

-류 씨의 앞으로의 계획을 밝혀 달라
▲특별한 것은 없다. 현재 운영 중인 전시관이나 영농조합의 발전에 기여했으면 한다. 강정배·남해/하일근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