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험과 사회적 무의식
사회적 경험과 사회적 무의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1.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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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즉, 하나의 사회에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아닌 사회 전체의 ‘사회적 경험’이라는 것이 있고 그에 따른 심리적 잔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 되어 사회 전체의 사고 및 행동양태에 중요한 요인으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학문적 가설로 내세우고자 한다. 만일 이 가설이 진리라면, 그것은 각 사회별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이 다르다고 하는 현상 내지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그리고 흥미로운 설명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재미 삼아 말하자면 ‘사회적 프로이트주의’라고 할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본인들은 독일인들과 달리 지난 전쟁에 대해 제대로 된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과 그 주변국들과는 달리)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 왜 그럴까? 위의 가설, 즉 사회적 프로이트주의에 따른다면 거기엔 일본인들의 특이한 사회적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침략’과 ‘전쟁’이라고 하는 행위가 결코 ‘악’이나 ‘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당연히 ‘반성’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침략과 전쟁을 가능하게 했던 (특히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강함’, ‘힘’, ‘실력’이라고 하는 것, 특히 ‘승리’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선’인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독특한 ‘사회적 경험’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무의 역사’다. 전국시대와 막부시대, 그 과정에서 겪은 무수한 전쟁의 기억, 그 가운데서 너무나도 당연했던 승자의 지배, 그리고 패자의 복종…. 그러니 ‘강’과 ‘승’은 곧 선이요, ‘약’과 ‘패’는 곧 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일본이 강해서 조선을 삼키고 중국을 침략한 것은 선이었는데 왜 그것을 반성하라는 말이냐. 말도 안 된다…’ 일본의 사회적 무의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반성해야 할 악은 다만 강한 미국에게 패배했다는 것, 그것뿐인 것이다. 그들이 전후 미국에 너무나도 순순히 복종하고 지금처럼 미국을 절대선으로 추앙하는 것도, 그리고 다시금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를 지향하면서 헌법의 개정을 시도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된다.
또 이런 것도 있을 수 있다. 근간에 중국에서 체포된 한국인 마약사범들이 잇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한국정부는 중국당국에 인권을 거론하며 수차례 항의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이를테면 ‘마약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용서할 수 없는 극악한 범죄’라는 것과 ‘중국은 만방을 거느리는 세계의 중심 국가’라는 사회적 무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시 마약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로 내몰렸던 청말의 역사적 사실과 수천년에 걸친 중국과 주변국들간의 조공관계라는 사회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이런 현상들은 그야말로 무의식의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목소리를 높인다고, 주먹을 쥔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애당초 해결될 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사회적 행동양태에 만약 어떤 ‘문제’라는 것이 감지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무의식과 그 근원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험을 학문적으로 면밀히 검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한 세기, 우리는 그야말로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엄청난 사회적 경험들을 감당해왔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일본의 패전과 해방, 남북의 분단과 625전쟁, 휴전과 냉전, 419, 516, 1026, 1212, 그리고 610, 629, 그런 한편으로 올림픽과 월드컵, 최근의 한류와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이 겪어온 사회적 경험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 심리적 잔영들이 우리 사회의 저 깊고깊은 밑바닥에 무의식으로 침잠하여 도도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제 우리는 프로이트의 심정으로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표출되고 있는 저 엄청난 사회적 문제들, 병적 현상들의 근원을 짚어봐야 한다. 올바른 진단이 이루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아픔을 딛고 한 걸음 앞으로 그리고 위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금의 이 사분오열을 딛고, 좀 더 건강하고 고급스런 사회가 되기를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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