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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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1.2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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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태점/경남수필문학회 회원
 

어느 맑은 가을날, 조계산 송광사 초입에서였다.

가을 가뭄에 수척해진 계곡을 옆에 끼고 오르다 곱게 물든 단풍 숲을 넋 놓고 올려다보는데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더? 더?” 헐떡이며 묻는 목소리가 턱에 닿아 있었다. 중년의 아들에게 거의 매달리듯 몸을 맡긴 채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백발 할머니는 연신 ‘휴우 휴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경치 참 좋지요?”
턱밑까지 숨이 차오른 할머니가 참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할머니의 대답은 흐뭇한 미소가 아닌 고통스럽고 힘겨운 울음 비슷한 것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니 마음이 저릿했다. 할머니가 좀 더 젊어 기력이 있을 때 모시고 왔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오래전 나도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왔을 적에 몇 발짝씩 걷다 굽은 허리를 펴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어머니 모습이 어른거려 코끝이 찡했다. 지금 내가 딸과 함께 단풍구경을 다니는 것처럼 어머니가 노쇠하기 전에 진작 모시고 다녔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눅눅히 젖은 마음 한 자락이 빗금을 긋는다.
딸은 언젠가부터 장거리 여행에 힘들어 하는 저의 아버지 모습을 눈치 채고 함께 다니기 염려돼 부담스러워 했다. 이번에도 걱정하는 딸을 구슬려 따라나서긴 했지만 혹여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편이 안쓰러워 짠하다. 이건 대체 딸 눈치 보랴, 남편 눈치 살피랴, 단란하고 홀가분해야 할 가족여행이 아니라 효도여행이 된 꼴이다.
오전에 낙안읍성을 한 바퀴 돌아볼 때부터 힘든 기색이 역력하던 남편을 절 들머리 쉼터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괘념치 말고 갔다 오라’ 며 뒤쳐진 남편이 목에 걸려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아들에게 이끌리다시피 걸어가던 할머니가 있는 힘을 다해서 짜낸 웃음 속에 감춰진 울음 같은 흐릿한 미소에서 뒤쳐진 남편의 모습이 얼핏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침내, ‘효도여행 스톱!’을 외칠뻔 하다가 그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파트 쓰레기통 주변에는 굶주린 길고양이들이 먹이를 찾아 쓰레기봉지를 헤집는 광경을 자주 본다. 어느 날 쓰레기통 주변에서 길고양이는 매서운 눈빛으로 한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나무위에서 두 날개를 잔뜩 부풀린 새 한 마리가 고양이를 향해 내리꽂히듯 돌진하는 것이었다. 지빠귀였다. 지빠귀는 인가 가까운 산이나 숲에 사는 새다. 가끔 아파트 화단 나무열매를 따먹는 새였다. 고양이는 미동도 않는데, 지빠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안절부절 푸덕거렸다. 웬일인가 해서 주위를 살폈더니 땅바닥에 잿빛털이 보송한 새끼 새가 눈을 똥그랗게 굴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미 지빠귀는 날개를 한껏 부풀려 온몸을 던져 위기에 처한 새끼를 지키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어미 새는 고양이의 매서운 눈빛도 날카로운 발톱도 무서울 게 없었다. 어미의 새끼사랑이란 사람이건 동물이건 별반 다르지 않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텔레비전에서 동남아 어느 나라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를 추적한 기록필름을 본적이 있다. 차마 형용하기도 조심스런 심신 기형인 사림들이 극한의 궁핍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한 아이가 우리 속에 갇힌 채 입을 크게 벌리고 벙싯거리는 옆에서 눈물을 훔치던 아이의 엄마가 말했다.
“나는 밤마다 이 아이 곁에서 웃통을 벗고 자요. 모기가 이 아이 대신 내 피를 빨아 먹도록……”
모성은 딱 이만큼이다.
자식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억지웃음을 짜내게도 하고, 알몸이 되어 모기를 유인케도 하고, 새끼를 구하려 온몸을 던지는 순정한 모성이리라. 자식들이 그런 어미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세상 어느 마음 중에서도 가장 강인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은 모성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도 어머니의 사랑이요, 그 어떤 고마운 분도 어머니일 것이다. 인내와 정성과 지혜의 덕으로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속에 잔물결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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