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옥종 항일투쟁사
하동군 옥종 항일투쟁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1.2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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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경남지역에서 3.1운동 당시 가장 많은 군중을 동원해 투쟁한 곳은 진주와 옥종면이다.
진주 3.1운동은 고등경찰기록에 일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라고 했으나 일경 입장에서 축소해 보고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볼 때 2만명의 군중이 시위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한편으로 3만명의 시위군중이 동원되었고 걸인. 기생. 노동단. 기독교인. 천주교인. 청년회. 남녀학생등 각계각층이 집합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황제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진주의 김재화. 심두섭. 박대업. 조응래 등 4명이 각각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입수해 도보로 귀향하자 곧 김재화 자택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고 격문을 작성하고 정용길 부자는 태극기를 만들고 천전동에서는 독립선언서 3천장을 등사하는데 성공했다. 서로 비밀 연계를 두고 각기 준비활동을 전개했다.
진주시내 다섯 장소에서 동시에 시위를 전개하기 위해서 신호가 필요해 종소리가 선택되었다.
1919년 3월 18일 낮 12시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5곳에서 일시에 독립만세를 외치니 중앙시장. 법원 앞. 촉석공원 앞. 대안동. 봉곡동. 망경동 등이다.

옥종면 3.1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산청군 단성장에 갔다가 시위현장을 목도하고 감동을 받은 하일노. 이수호. 권상숙. 하계원. 하성백 등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옥종면도 만세시위를 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논의하고 비밀 연락망을 두고 김중수. 정화영. 최인우 등과 함께 3월 24일 문암장터에 집결하니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권대섭. 권대형 형제도 스스로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동참하니 문암 장터에 약 6천명의 군중이 집합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경과 헌병들은 혼비백산할 수 밖에 없었는데 국가보훈처의 기록에 의하면 단성면. 수곡면. 청암면. 옥종면 4개 면민들과 장꾼들 6천명이 일제히 만세시위를 전개했다고 했으니 산천초목이 깜짝 놀랄 정도로 거대한 물결이었다.
시위에 앞장선 이들은 모두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숨었으나 하일노. 이수호. 하계원. 하성백. 권대섭 5명은 당당하게 잡혀 재판을 받았다.

옥종면 문암장터의 시위를 목도한 청암면민들도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동참할 동지들을 구하니 3백 여명이 동원되었다. 다음 장날 3월 29일 아침 청암면에서 출발해 옥종 문암 장터로 진행중 일경에 탐지되어 정남시. 하형수 등이 피체되고 말았다.,
주동자들은 일경의 혹독하고 무지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다.

1차 주동자들과 2차 주동자인 정남시 징역 1년. 하형수 태장 60도를 맞고 고생한 애국충정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
작은 시골 면지역 장터에 6천명의 군중이 동원되었고 독립만세를 외친 투쟁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거룩한 희생이었다.

옥종면은 동학란 당시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고 농민항쟁에 동참한 분들이 많아 항일의식이 고조된 지역이다.
지리산 의병장 박동의, 류명국. 이학노. 양문칠. 손기혁. 이상수. 정한용. 조인환. 김용이 등이 투쟁한 곳이다.
1908년 6월5일 하루 밤에 51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을 당하고 이어 117명이 옥종면내에서 순국한 고장이기 때문에 고귀한 희생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옥종면을 중심으로 투쟁하고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추모사업이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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