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 김윤권 선생과 박봉제 선생
항일투사 김윤권 선생과 박봉제 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2.11 1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진주시 미천면 출신 항일투사 김윤권(1876~1944년) 박봉제(1897~1939년)선생은 미천면 3.1운동을 총지도. 지휘한 분들이다.

진주시 의거는 기미년 3월 18일 낮 12시에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따라 다섯 장소에서 동시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기생, 걸인, 순사, 교사, 학생, 노동자, 상인, 농민, 천도교인, 기독교인, 남녀노소가 모두 동참해 2만~3만명이 시위를 전개한 의로운 투쟁이었다.
진주시내 중앙시장과 법원 앞. 봉곡동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도청을 향하여 시위하는 군중을 보고 감화감동을 받은 김윤권(金潤權)박봉제(朴奉濟:이명 朴允浩)선생 등이 미천면으로 돌아가 의거를 준비했다.
위 2명은 불타는 복수심과 애국심을 억제할 수 없어 평소에 뜻을 함께 했던 곽복금 선생을 불러 마음속의 소신을 밝혔다.
부모가 위급하면 자식이 일어나고 나라가 위급하면 국민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니 스스로 방관자가 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다짐했다. 인근의 애국 동지들을 모아 독립의우회를 조직하고 각 부서를 정했다.
회장 박봉제, 부회장 임일포, 참모 김만권, 정준길, 김택선, 노기주, 이화서, 김치홍, 임제환, 곽복금 등으로 정하고 박봉제 선생이 항일의 뜻을 밝히고 나라의 정세를 설명했다.
의거일은 3월 20일 밤 집합 장소는 오방. 벌당의 경계인 동매마을로 정했다.
약속장소에 700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박봉제 선생이 자신의 두루마리를 찢어 깃발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앞세우고 의우회 맹약을 낭독했다.
김윤권 선생은 7백 여명을 동원하기 위해 비밀 연락망을 두고 당일에 군중의 선두에서 시위를 지도하고 미천면사무소 방향으로 진출할 때 선두에서 투쟁했다.
그날 밤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 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자 박봉제 선생은 산청 황매산으로 숨어 들어가 약 4년간 동굴 생활을 하고 일본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위한 동지를 규합하는 등 활동하다 1937년경 귀국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39년 세상을 떠났다.
김윤권. 노기주 선생은 자택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1919년 6월 4일 진주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각각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윤권 선생의 후손들이 의거사실을 알고 자료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찾아 다녀도 나오지 않자 포기하고 있을 때 필자가 경남도청 문서고로 가자고 말해 마침내 기록물을 찾았고 1992년 가을에 포상신청서. 공적서 등을 작성해 제출해 주었기 때문에 1993년 4월 13일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필자는 종친회 이름으로 감사패를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