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린 우정
흔들린 우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2.2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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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먼 옛날 사슴과 말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슴은 숲속에서, 말은 들판에서 가장 빠른 동물로 인정받는 공통점이 그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슴과 말은 생활하는 장소가 달라 들판과 숲의 경계 부근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서로 상대방이 사는 곳에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다. 먼저 말이 숲속의 사슴을 방문하기로 했다.


초원에 상쾌한 가을바람이 불던 날, 말은 숲으로 들어갔다. 난생 처음 숲을 찾은 말은 숲속에 들어가자마자 후회했다. 숲과 들판은 너무 다른 세계였다. 숲속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커졌고 잎은 무성해 앞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보이는 것은 나무 가지와 무성한 잎뿐이었다. 들판에서 환하게 빛나던 태양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갑갑하기만 하였다.

불안해진 말은 이런 곳에서 사는 사슴이 문득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내심 자신이 사슴보다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숲속이라면 자신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슴의 민첩함이 생각보다는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사슴보다는 말의 기동력이 더 뛰어났다. 그러나 말이 사슴의 민첩함을 두려워하는 순간 말은 처음으로 들판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서히 안개가 끼기 시작하자 말은 어두운 나무 그늘 밑에서 더 들어가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저쪽에서 무엇인가가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말을 마중 나온 사슴이었다. 하지만 놀란 말의 눈에는 사슴이 아니라 자신을 노리는 무서운 맹수로 보였다. 이윽고 사슴의 멋진 뿔이 보이고 사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말은 사슴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러나 숲에서 돌아온 말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질투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들판을 달려보았지만 예전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숲속에서 느낀 두려움이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자 말은 사슴을 이기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말이 한가롭게 들판을 거닐던 어느 날, 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내가 숲속에서 사냥을 하려는데 나를 도와주지 않겠나? 너에게는 빠른 다리가 있고, 우리 사람에게는 너를 배불리 먹을 만큼의 식량이 있네, 아무리 사슴이 빠르다고 해도 우리의 힘을 합치면 잡을 수 있지 않겠니?”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말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말은 먹을 것을 배불리 얻어먹는 조건으로 사람이 등에 타는 것과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달린다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고는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 사냥을 했다.

말의 배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사슴이 말이 자기가 좋아서 찾아 온 줄 알고 마중을 했는데, 등에 탄 사람이 고삐를 잡아당기고 채찍으로 때리는 바람에 너무 아파 사슴을 향해 뛰고 말았다. 그래서 사슴은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다. 말의 편리함에 맛들인 사람은 이후에도 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후 말은 매일 배부르게 먹이를 먹을 수 있었지만 사람이 만들 마구간에 묶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우정을 배신한 대가는 넓은 들판을 마음껏 달리는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우화(寓話) 한 토막의 내용이다.

17세기 영국의 극작가이며 건축가인 존 밴브러는 ‘가장 사이가 좋고 서로 인정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생각을 모두 말한다면 인생의 적이 된다.’고 했고, 또 19세기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과거에 한 번도 적을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인간은 결코 친구를 가질 수 없다.’고 했으며, 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인 쥘 르나르는 ‘가장 만족한 우정에도 계란과 마찬가지로 항상 약간의 틈이 있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인생이 허무할 때,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때 친구를 통해 위로 받기도 한다.

필자는 평소에 친히 지내던 오랜 친구에게 충언을 해 준 것이 비방으로 오해가 되어 지난해에는 흔들린 우정의 해가 되고 말았다. 존 밴브러의 충고처럼 생각을 모두 말해 버린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충고는 해 줄 수 있으나, 행동하게 할 수는 없다는 옛말이 되새겨 지기도 한다. 중국 명나라의 저명한 사상가인 여곤(呂坤)의 대표적인 저서 ‘신음어(呻吟語)’에 보면 “나를 헐뜯는 말은 들어 둘 만하나 나를 헐뜯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말의 해가 가고 양의 해가 왔기에 한 번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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