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와 주목
자작나무와 주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2.2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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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영/경남수필문학회 회원

 
창밖에는 는개가 수런거렸다. 빽빽이 들어찬 자작나무 숲에는 꼬리 긴 낯선 새들이 자유롭게 지저귀며 새벽의 적막을 깨웠다. 호텔 앞의 좁다란 오솔길은 정겨운 이가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은 상념에 젖게 했다. 그런 풍경에 어젯밤 늦게 백두산 아래에 도착한 피곤함과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주위의 분위기조차 잊었다.

천상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한 긴 물줄기의 장백폭포아래, 통나무를 엮어 만든 숲속의 산책로를 같이 걷던 젊은 여선생이 “지리산의 주목을 닮은 남자와 백두산의 자작나무 같은 여자가 천생배필!”이라고 하였다. 겉과 속이 붉은 주목을 닮은 남자는 정열적이어서 사랑이 식지를 않는다고 한다. 여자라면 누구나 일생동안 변하지 않고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를 원하지 않겠는가.

자작의 일종인 사스레나무는 매서운 추위를 좋아하고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자란다. 키 큰 자작도 북극이 가까울수록 난쟁이로 변해 수만 그루가 얼싸안듯 얼어붙은 땅을 이불처럼 덮고 있다. 껍데기를 벗겨도 또 다른 껍데기가 자꾸 나와서 속내를 알 수 없고 변신을 일삼는, 항상 신비로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자와 비유된다. 가을의 백두산은 곱게 물던 자작나무 잎으로 황금색 물결을 이루고 뽀오얀껍질로 감싸인 둥치는 미인의 살결을 연상시킨다.

소녀 때는 가끔 환상 속에 빠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과 변치 않고 일생을 함께하리라는 부푼 기대감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수록 상상했던 미래가 얼마나 부질없었던가를 알게 되고 눈앞에 놓인 현실 앞에서 때론 절망하기도 한다. 부부로 만나 몇 십 년을 한 지붕밑에서 살며 여자는 신비스러움을 잃지 않고 남자는 사랑을 느낀 처음의 그 정열을 간직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삶의 범주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도 부정 할 수 없는 일이다.
눈앞에 닥치는 수많은 일들을 헤쳐 나갈 때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며 고아한 자태로 대처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럴 때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상대방에 대해 실망하고 못내 참아야하는 인고의 세월도 보내야 하리라.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많으면 실망도 커진다. 내가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기보다 험난한 세상 한 자락, 내 옆에 있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실망으로 인한 가슴앓이가 조금은 덜 할 것 같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함께한 부부의 주름진 얼굴은 이성 간의 사랑보다 그저 담담한 혈연의 정이 느껴져 편안해 보인다. 그것은 주목의 정열과 자작나무의 신비로움을 잘 승화시킨 이들만이 이룰 수 있는 생의 서사시가 아니겠는가.

백두산 주변의 사람들은 자작나무 아래에 태어나서 자작나무와 함께 살고 자작나무에서 죽는다고 한다. 지붕과 땔감, 생을 마감 한 뒤의 관까지 자작나무를 사용해서 생긴 말이다. 순수함과 정결을 잃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어머니 같은 자작나무의 품성. 그런 성품을 반만이라도 지닌 여자에게는 아무리 잘못된 남자라도 때론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해주는 주목 같은 남자가 되어보려 노력할 것 같다.

늦가을부터 눈부신 은빛나신을 드러내는 겨울숲의 귀부인인 백두산의 자작나무와 한겨울, 지리산의 칼바람에 붉은 청춘을 자랑하듯 의연한 자태로 당당히 선 주목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래서 멋을 아는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선물로 받은 주목으로 만든 찻잔 받침을 본다. 불타는 듯 타올라 나이테의 흔적조차 지워버린 붉은 나무. 상대에 의지하지 않고 순수한 영원을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연인의 품성이 이럴까. 주목받침 위에 자작나무로 곱게 다듬은 치마 입은 목각인형을 얹는다. 어디선가 참새목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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