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의 철학
의자의 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0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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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딩동~” “택배 왔습니다~”
며칠 전에 주문한 의자가 왔다. 몰랐었는데 조립식이었다. 딸과 함께 끙끙거리며 의자를 완성했다. 나름 재미있었다. 앉아보니 느낌도 나쁘지 않다. 만족했다. 그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아무래도 무슨 직업병인지 나는 닥치는 대로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그 본질을 물어보는 습성이 있다. 어쩌면 대학 1학년 때 처음 철학을 배우면서 “진정한 OOO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물어대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건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 또 습관적으로 “의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 본질을 묻는 것이다. 일반의 눈으로 보면 좀 별나 보일 수도 있겠으나 철학자라는 자가 이 정도의 습관조차도 없다면 그 또한 사이비일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속으로 대답한다. 의자란 앉는 것이다. 그런다면 왜 앉는가. 편하기 위해서 앉는다. 편하게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앉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대로 일체 존재에는 질료, 형상, 동력, 목적이라는 4가지의 원인이 있다. ‘위해서’라는 ‘목적’도 그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의자에도 각각의 목적이 있다. 그 목적 속에 의자의 본질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떠올랐다.

이 세상에는 거의 인구의 수에 맞먹는 의자들이 있는데, 이 의자라는 것이 실은 천차만별, 제각기 다 다른 것이다. 모양이나 재질은 물론 거기에 앉게 되는 엉덩이들도 다 다른 것이다. 엥? 엉덩이야 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게 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 엉덩이가 ‘누구’의 엉덩이냐에 따라 그것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아닌 말로 청와대 집무실의 육중한 의자에 걸터앉은 대통령의 엉덩이와 양수리 물가의 접이식 의자에 쪼그려 앉은 한 낚시꾼의 엉덩이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의자란, 철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자리’를 상징한다. 거기에는 각각 ‘역할’이라는 것이 부여돼 있다. 60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최희준의 노래 ‘회전의자’도 그것을 알려준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하는 그런 의자는 출세한 ‘높은 사람’이 앉아서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보통과는 다른 의자인 것이다. 그런 만큼 모든 의자에는 그 역할을 제대로 잘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엉덩이가 앉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의자라도 거기에 누가 앉는냐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문제들이란 실은 많은 경우 이 의자에 앉은 잘못된 엉덩이에서 비롯된다.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의자에 앉아 그 의자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데서 ‘문제’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유명한 공자의 ‘정명사상’이나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같은 것도 그 바탕에는 실은 이러한 상황 인식이 깔려 있다. 왕이나 신하나 부모나 자식이라는 이름이 그 이름값을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철학인 것이고, 통치자와 수호자와 생산자가 각각 그 본질인 지혜, 용기, 절제라는 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실현시키지 못하니 문제가 된다. 그러니 그것을 제대로 해야 종합적인 국가의 덕인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게 플라톤의 철학인 것이다. 공자든 플라톤이든 또 다른 누구든 사회-국가-세상과 관련된 정치철학이라면 일언이폐지왈, ‘자릿값 제대로 하기’ 즉 ‘제대로 된 엉덩이가 제대로 된 의자에 앉아 제대로 된 일을 해야 제대로 된 세상이 구현될 수 있고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둘러보면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대통령 자리에서 9급 공무원 자리에 이르기까지 의자를 둘러싼 다툼은 치열하기가 이를 데 없다. (무릇 세상의 의자들이란 다 살벌한 쟁탈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할까. 과연 그 자리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 제대로 그 자리에 앉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못한 경우들을 지금껏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한심하고 염려스런 현실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엉뚱한 자리에 앉아 엉덩이가 좀 근질근질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정도만 돼도 그래도 양심은 있는 편이다. 남의 자리를 가로채듯 차지한 대부분의 뻔뻔한 엉덩이들은 스스로 그 자리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눌러앉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별의별 수단을 강구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정신이 번쩍 드는 얼음의자나 앉자마자 튕겨나가는 용수철의자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줘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자는 도대체 어디에 주문을 하면 되는 걸까? 택배는 해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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