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閑山大捷)
한산대첩(閑山大捷)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1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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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고성반도와 거제도의 서남사이에 산재해 있는 여러 섬 중 하나인 한산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1593년 7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1545~1598)이 여수(本鎭)에서 벽재(僻在)의 방어가 어렵다고 하여 이 섬에 본진을 옮겼다. 같은해 8월 이순신이 충청, 전라, 경상 3군 수군통제사를 겸임 이섬에 통영(統營)을 설치하게 되자 우리나라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1592년 5월 여러 차례에 걸쳐 적의 수군을 격파한 이순신은 일본의 병선(兵船)이 가덕도 거제도 등 출몰 육군과 호응한다는 보고를 듣고 출동을 결정 이때 일본은 남해안 일대에 해전에서 싸울 때마다 연전 패전하므로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와키자키(脇坂安治)의 제1진 70여척이 웅천방면에서 출동하여 도요토미(豊臣秀吉)의 특명을 받은 구키(九鬼嘉隆)도 40여척을 거느리고 왔으며 3진의 가토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兵船)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은 7월 6일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90척을 이끌고 좌수영을 출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합세 일본수군이 정박한 견내랑(見乃梁)에 이르렸다.
7일 저녁, 그는 적의 대선(大船)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을 발견하고 전략상 우세한 곳으로 유인 견내랑은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한 점 등 이곳으로 물색 지형적으로 도피할 곳도 없고 적이 궁하여 상륙하더라도 아사(餓死)를 면할 수 없는 곳이다. 이순신은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병선을 공격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陳)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다만 뒤떨어졌던 10여척은 이 광경을 보고 도주하여 한산도에 상륙하였으나 군량이 없어 13일간 초식(草食)하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 일본수군을 전멸시켰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의 관계(官階)를 받았다. 이순신은 견내랑 결전의 날을 앞두고 군사들에게 결의하였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여기에 이르렸으니 어찌 한번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모두 충의(忠義)에 죽어 나라 지킨 영광을 얻자.”라고 하였고 결전의 날 다시 군사들 앞에 섰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면 죽은다(死則必生, 生則必死)”하셨다.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소재 1593년 수군 총본영을 옮겨 대승전을 이루어 제승당(制勝堂)을 건축 양병구국과 통수의 만전을 다하던 전적지로 1639년 조경장군, 1786 김영완 장군이 제승당의 현판을 걸었다. 1932년 통영의 유림에서 충무영당을 창건하였고 1948년 도내 초등교생 모금으로 충무공 유적 한글비 건립, 1956년 도비로 당우의 단청을 입혔다. 사적 11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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