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농업(中國農業)의 전개과정(Ⅰ)
중국농업(中國農業)의 전개과정(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1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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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이번 칼럼에서는 중국 농업의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겠다.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갑골문(甲骨文)에 나타난 글자 외에도 여러 사적에 의하여 중국이 이미 은상(殷商) 시대에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확실시되고 있다. 그것이 주(周)대의 봉건제도로 토지의 공유화를 실시한 뒤 춘추전국 시대엔 농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관자(管子)·상앙·한비(韓非) 등의 부국강병론은 모두 농업을 그 방법의 제일책으로 삼아 농업을 장려했던바, 이미 철기(鐵器)로 농구를 삼고, 나아가서는 심경(深耕)의 농작 방법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수리관개(水利灌漑)를 개척하고, 시비(施肥)의 필요와 농시(農時)의 적기 이용을 제창한 바 있으니, 농사기술의 상당한 진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일찍이 한(漢)대처럼 중농정책을 쓴 예는 없다. 전란의 초토에서 많은 정치가의 중농에 대한 주장과 한나라의 효·혜·문·경(孝惠文景)왕의 권농조서(勸農詔書)에 힘입어 농업은 드디어,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 지위를 높였던 것이다.

정책적인 권장 내용을 보면, 황제의 친경(親耕)이 있었고, 농사철엔 급역이 아니고는 부역에 동원을 금지했거니와, 지방에 농관(農官)을 배치하여 농사를 지도했고, 독농가(篤農家)를 표창하기도 했다.
작농 방법상 진보한 내용을 보면, 이미 신식 농구를 개발했고, 소를 이용하여 경작했는가 하면, 특히 해마다 장소를 바꾸어 경작하는 대전(代田)방법과 이랑을 깊이 펴서 관개(灌漑)를 편리하게 구전(區田)방법은 증산할 수 있는 진보적 경작법이었다.

그러나 초지의 자유 매매로 상인들이 대부분 지주(地主)가 되었기 때문에 농민의 자작농은 감소된데다가 부역과 구부(口賦:일종의 주민세)의 과중으로 당시의 농민 생활은 결코 부유하진 못했다.
오호(五胡)의 난을 겪은 북조(北朝)는 장기의 전란으로 생산이 중지되고, 토지제도도 문란하여 암흑시대를 빚었고, 남조(南朝)는 중앙정부가 무력한 틈을 타서 대지주 즉 호족들의 발호로 자작농은 극히 제한을 받게 되었다.

수·당(隨唐) 시대의 농업은 북조(北朝)부터 실시한 균전제(均田制)를 남방에까지 확장시켜 수 개황(隨開皇) 9년(589)엔 개간 면적이 19,404,267경(頃)으로 매호(每戶) 평균 2경 남짓을 갖게 되었는바 당대 무덕(武德) 7년(624)까지 계속되었다.
당(唐) 고종부터 균전제는 무너지고, 지주가 통치하는 장원(莊園)제도가 대두되자 대지주 아래서 노예적인 경작이 성행하였다.

한편 수(隨) 문제 때 부자들의 의연미(義捐米)를 모아 흉년에 대비하고 빈민을 구제하려던 의창(義倉)제도는 관리 부실로 오히려 농민에게 식량을 수탈하게 되는 결과를 빚었는데, 이 제도는 당대에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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