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은 나라를 따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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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6.02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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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쌍계사

▲ 고운 최치원선생의 명문, 진감선사대공탑비.
도내에는 38개의 국보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고(수다라장, 법보장), 이 판고 사이에 있는 고려각판 28종, 그리고 현존 비석 중 가장 오래된 창녕 신라진흥왕 척경비, 한반도 전통양식의 통일신라시대 작품 창녕 술정리동 3층석탑, 청동에 은실을 상감한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청곡사영산회괘불탱, 통영 세병관, 마지막으로 국보 47호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대표적인 도내 국보에 속한다.
이번 주에 소개할 여행지 하동 쌍계사에 이 탑비가 있다.
쌍계사는 잘 알려진 대로  두 갈래의 계곡이 하나로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신라 성덕왕 23년(724)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이 창건했다. 이때는 옥천사였으나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꿨다. 문성왕 2년(840) 중국에서 공부하고 온 진감선사가 중창해 규모 있는 절로 탈바꿈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된 것을 인조 10년(1632) 벽암스님이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840년 절을 중창한 진감선사의 탑비가 유명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선사의 훌륭한 행적도 행적이지만 탑비에 글을 쓴 고운 최치원(857 -?)선생의 글씨와 문장이 1200년의 세월을 마치 종이부채 접듯이 살라먹고 우리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실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에서 쌍계 석문을 지나 물길을 건너고 쌍계사에 이르는 아늑하고 편안한 산책로는 세상 시름을 잊게 해주는 아름다운 길이다. 불일평전과 불일폭포까지의 등산로 주변도 지금 한창 싱그러운 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하동읍에서 1023군도를 따라 가다가 용강마을 못미쳐 오른쪽 쌍계2교가 들머리다. 다리를 건너 ‘갈지(之)자’ 길을 따라 오르면 왼편에 타원형으로 생긴 작은 광장이 나온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으로 주변에는 원형을 따라 가옥과 주막 토산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절로 향하는쪽 트인 곳에 두개의 거대한 바위가 ‘쌍계석문’이다, 석문에 새긴 글이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석문광장은 과거 쌍계사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 광장과 길은 사람들에게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수년전에 이 광장을 비켜서 쌍계사로 오르는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뚫렸기 때문.
가끔 옛 길을 아는 이가 있어 추억하기 위해서거나,  타지에서 쌍계석문을 찾아보려고 일부러 온 것이라거나, 이도 아니면 막걸리 한사발에 목을 축이기위해 오는이 외에는 찾는이가 별로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편리함을 쫓아 아스팔트길을 따라 매표소로 곧장 가버린다. 이제는 보다 빠른, 보다 편리함의 뒷전으로 나 앉은 형국이다.
 

매표소를 지나 물길을 건너면 도시의 삭막함을 잊을만한 숲이 울창하다. 수령 백년짜리 굴참나무 써나무 상수리나무 등 낙엽활엽목이 주류를 이룬다. 머리를 들어 하늘에 숲을 보면 갖은 종류의 이파리가 싱그럽고 그 사이로 강렬한 태양빛이 영사기의 조명처럼  쏟아진다.
때마침 계곡에서 이는 바람이 살갗에 닿아 기분마저 상쾌하다. 요즘 대세가 되고 있는 휘튼치드가 바람에 실렸는지 코끝이 알싸한데 아마도 새벽녘의 산책이라면 한결 더 좋을 것이다. 몇 차례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 저만치 숲 사이로 빼꼼이 보이는 건 쌍계사 일주문. 물길이 일주문 앞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흘러간다.
 

▲쌍계사 절의 배치구조는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 탑비, 대웅전 4개구간으로 비교적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금당영역 세 개의 건물은 일직선 상에 배치하지 않고 서로 맞물리게 배치해 세 건물이 조화를 이뤄 상승효과를 연출한다고 한다.
대웅전 앞, 아담한 마당 한복판에 검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여느 절에 나타나는 석등을 좌우로 밀어낸 진감선사 탑비,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비문이 새겨진 정면이 보이지 않고 옆모습만 보인다. 유독, 선사의 탑비는 옆으로 돌아 앉아 있다. 그래서 비문을 보려면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관람자의 동선까지 생각한 것이라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비켜서서 이 비문을 읽어보라는’,
단조로운 직선에 변화를 주면서 비석의 입체감을 느끼게 하라는 의도라고 한다. 하지만 설계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관람자의 머리를 헤집는 것은 도무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모호함’이다.

▲이 탑비는 신라 말엽의 왕들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고승 진감선사(혜소 774-850)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887년 세운 것이다.
진감선사는 당나라에 가서 불교 공부를 하고 귀국해 선법을 펼친 뒤 77세때 쌍계사에서 입적했다.
탑을 받치던 귀부(龜趺), 중앙에는 높직한 비좌(碑座), 비문을 새긴 몸돌, 그 위에 있는 한쌍의 용머리, 높이 3.6m, 너비 1m로 몸체는 흑대석,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다
비문은 서두에 언급한대로 신라 최대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글자는 2.3cm 크기의 해서체 2417자가 새겨져 있다.
 

비신 일부가 깨진 것은 임란과 한국전쟁때문이었다. 국보로 지정될 즈음인 1963년 이후 파손을 우려해서 쇳덩이로 각 면을 감싸 지지해놓았다. 사람으로 치면 마치 허리가 부실한 환자가 깁스를 한 것처럼 보인다. 1963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사진에는 쇳덩이 지지대가 없다. 훼손된 부분은 오래 전에 탁본한 판본이 남아 있어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로 진감선사 공적 기록인데 당으로 갔던 사실과 구법과정, 830년 귀국 이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은 나라를 따지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2417자의 비문은 구구절절 명문으로 진감의 일대기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문에는 유교와 불교의 근본 사상이 다르지 않음을 적고, 본문에는 노장사상을 보여주는 용어와 개념들이 기술돼 있는데 삼교를 하나로 파악한 것이라 한다. 이는 최치원의 사상과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주류를 반영한 것이라 한다. 또 진감의 범패와 전래도 기술하고 있다.
 

몸체 위 머릿돌에 쓴 ‘해동고진감선사비 ‘비명’의 글씨는 비문글씨와는 전혀 다른 고운의 전서체. 글씨 주변에는 불을 내뿜고 있는 두마리 용이 새겨져 있다. 문외한이 봐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속인俗人)의 한계로 그저 그런 표현 밖에 할수 없음이 안타깝다. 그래도 유명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당 최남선은 “당의 명필 구양순의 뼈대에 안진경의 살을 붙여 특색을 나타낸 글씨”라고 찬탄했다. 또 다른 이는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라고 했다.
 

쌍계사 팁 하나, 금당의 효성각 담장에 깨진 기와조각으로 새겨 넣은 ‘물수(水)’자는 앙증맞기 그지없다. 화재를 막기 위해 새겨놓았다는 선암사의 한 건물과 의미가 같은 것이리라.
쌍계사를 휘돌아 불일폭포 산책길에서 드는 감상의 편린(片鱗), “1200년 전 쌍계사에는 고운의 천재적 고민이 있었고, 이 탑비를 세우기위해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부산함이 있었으리라”. 그것은 마치 꿈인 듯도 하고 환상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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