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옥중순국 김재화·권채근 선생
3.1운동 옥중순국 김재화·권채근 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1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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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진주 3.1운동은 기미년 3월 18일 낮 12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재판소 앞. 중앙시장. 대안동. 촉석공원. 군청 앞 등지에 대기했던 군중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됐다.


‘고등경찰관계적록’에 의하면 “진주 예수교 예배당에서 울리는 정오의 종소리를 기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약 1만 명이 모여 평안동 재판소 앞에서 진행하고 진주 강변을 따라 본성동에서 일제히 시위를 전개하는 소요를 일으켰다” 라고 기록됐다.

3월 10일 아침 진주시내 곳곳에 격문이 나붙었는데 “왜 삼남에는 일어나지 않느냐”라는 내용이었고 3월 13일 진주장날 시위를 전개하려다 순사들이 동참하면서 3월 18일 장날로 연기할 것을 권하게 된다.
고종황제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한 김재화, 박대업, 조응래, 강달영 등이 진주시 집현면 하촌리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고 투쟁방법, 장소 등을 의논하고 김재화(金在華)선생은 별도로 교유문을 작성했다.

3월 18일 진주장날 약 2~3만명의 군중이 영남포정사 방향. 즉 경남도청 앞으로 진행하며 시위를 전개하고 3월 19일 기생. 걸인들이 앞장서서 시위를 전개하고 같은 날 광림학교 졸업생 김영조, 이영규, 천명옥, 박성오 등이 큰 북, 작은 북, 드럼벳, 코르넷을 불면서 시위했다.

‘대구감옥 집행지휘서’에 의하면 “피고 이영규 등은 3월 19일 오전 11시경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진주시 평안동과 대안동 사이 노상에서 악기를 불면서 기세 당당히 태극기를 흔들며 소요를 일으키고 독립만세를 외쳐 치안을 방해했다”라고 기록됐다.

김재화(1892~1920)선생은 자택에서 비밀회합을 가지고 교유문을 작성해 군중들에게 배포하고 매립지(이마트)에서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다.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돼 1922년 봄에 석방될 예정이었지만 1920년 4월 15일 별세하신 이유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했기 때문이다.
권채근(1889~1920)선생은 진주시 수정동 출신으로 32세 청년이었다. 김재화. 강달영 선생과 함께 매립지(이마트)에서 시위를 주도할 때 두 아우 권봉근. 권유근 등과 시위를 지도해 엄중한 조사와 혹독한 고문으로 혼절했다.

1920년 1월 23일 차가운 대구감방에서 순국했고 두 아우들은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다.
김재화, 권채근(權采根)선생은 1991년 12월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고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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