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박치화(朴致和)선생은 3ㆍ1운동 지도자로 광복 후 행적 때문에 유명해 졌고 형제가 3ㆍ1운동 지도자였기 때문에 또 훌륭한 집안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하동읍 시위를 주도하게 되는데 그 당시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 선생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지역민을 위한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지역 인사들과 공동으로 작성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고등경찰관계적록’에 의하면 “적량면장 박치화 수모자는 3월 18일 시장 내에 쌓아 둔 판매용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구 한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모인 군중 1500여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경찰서에서 일경 20여명이 출동하여 수모자를 검거해 진압했다”라고 기록했다.
박치화 선생은 일경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당당하게 조선 독립의 타당성을 설파하자 이에 감복한 판사가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그러나 검사가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해 결국 징역 1년형이 확정됐다.
박치화 선생의 아우 박문화(1901~1950)선생은 하동공립보통학교 재학생이었는데 같은 반 염상섭, 정점금, 전석순, 김봉안 등과 4월 4일 학생기숙사에서 3, 4학년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 80여장을 제작하고 시위하는 날 배포하게 된다.
4월 7일 오전 11시40분경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를 전개하다 일경에 의해 진압됐다.
5월 3일에도 학생들이 교정에서 축구시합을 할 때 교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경이 출동했고 남녀학생들이 조롱하며 욕설을 하며 대항하기도 했다.
박문화(朴汶和)선생은 학생시위 주도자로 선두에서 투쟁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고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혹은 태형 90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치화 선생의 후손들은 부산과 서울에 거주하고 박문화 선생은 한국전쟁 때 남원전투에 참전해 후손들이 남원에 거주한다.
박치화ㆍ박문화 형제의 항일투쟁사는 필자가 쓴 ‘하동독립유공자공훈록’87~92면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박치화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2007년)박문화 선생은 대통령 표창(1998년)이 추서됐다.
박치화 선생 등이 작성한 하동지역 독립선언서는 천안독립기념관에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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