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란시사(竹欄詩社)를 그리며
죽란시사(竹欄詩社)를 그리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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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경남수필문학회 회원
 

조선시대 선비 정약용 선생의 글 ‘죽란시사첩’ 서문을 읽다 문득 ‘죽란(竹欄)’이라고 나의 호를 지어주신 청암 선생님 생각이 났다.

청암 선생은 내가 고등학교 학생일 때 윤리를 가르치셨고 내가 모교에 와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같이 근무했던 은사이시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교직에 계시면서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지도하셨고, 성품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학생은 물론이고 동료 선생님들에게도 존경을 받던 분이셨다.
선생께서는 다른 동료교사들에게도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호를 많이 불러주셨는데, 어느 날 나에게 호가 뭐냐고 물어보셨다. 평소에 호(號)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고 지내는 터라 쓸 일도 없었지만, 몇 해 전 지인(知人)의 선친께서 남긴 한시를 번역할 때 딱 한 번 사용했던 ‘서죽(西竹)’이라는 호를 알려드렸다. 해질 무렵 남강 가에서 석양을 받으며 서있는 대나무 숲을 생각하고 그 당시 딴에는 멋을 내어 지은 호였다.
며칠 후 선생께서는, “서죽, 서죽 하니까 ‘소죽(소여물)’ 같은 느낌이 들어서 듣기 좋지 않은데, 내가 자네 호를 하나 지어줄까?”하셨다. 그렇게 해서 얻은 호가 ‘죽란(竹欄)’이다. 나는 반갑고도 고맙게 그 호를 받았다. ‘죽란’은 조선시대 학자 정약용 선생의 시문학모임 ‘죽란시사(竹欄詩社)’에서 따온 것인 줄 아는 까닭이었다. 내가 감히 정약용 선생이 만든 모임에서 따온 호를 사용하는 것이 황송하기는 했지만, 평소 다산(茶山)선생을 존경하고 그분의 글을 좋아하던 터라 기쁘게 받았던 것이다.
죽란시사(竹欄詩社)는 정약용 선생이 만든 시문학회다. 모이기 쉽게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살며 나이와 취미가 비슷하고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 15명으로 구성하였다. 죽란시사 회원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모일 때마다 소박한 대나무 평상에 앉아 시문도 짓고 담소도 나누며 그 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친목모임이 모임이 비단 ‘죽란시사’ 뿐일까 마는 이 모임에서 만든 규약이 특히 멋지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밑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모일 때마다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시가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하고, 나이 어린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주선하여 차례대로 나이 많은 사람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반복한다. 정기모임 외에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있어도 한턱내도록 한다.’

아마도 죽란시사 회원들은 늘 자연과 가까이 하면서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 같다. 그들은 꽃이 피면 기쁘게 모여서 시를 짓고 합평회도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한 턱 내기도 하면서 웃음꽃이 피는 이야기들로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청암 선생님은 내가 글 쓰는 취미를 가졌고, 문학회 활동도 하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이름지어주셨다. 그 뒤 선생님은 나를 만나면 언제나 다정하게 ‘죽란-’하고 불러 주셨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호를 불러주실 때마다 조선시대 ‘죽란시사’ 선비들의 풍류가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기분 좋은 이름을 불러주시던 청암 선생님은 몇 년 전 퇴직을 하셨고, 이제는 학교에서 ‘죽란’이라고 불러줄 사람도 없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사시던 조선시대에 이런 아름다운 규약을 가진 ‘죽란시사’ 정기모임이 얼마동안 계속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일과 생활에 쫓겨 살다보니 문학회 정기모임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죽란’이라는 이름을 늘 간직하고 있다. 다산 선생의 죽란시사 회원들처럼 마음이 통하는 문우들과 만나서 글도 쓰고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웃음꽃을 피우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살구꽃 피거나 함박눈 내리는 좋은 날에 편안한 장소에서 작품 합평회도 하며, 함께 어울려 책도 엮어내는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를 내내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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